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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트·혁신·충돌 … 패션 디자인의 진보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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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0호 16면

내년 봄여름 트렌드를 선보이는 서울패션위크가 16일부터 21일까지의 일정을 마쳤다. 지난 5월 정구호 휠라코리아 부사장이 총감독으로 부임한 가운데 대대적인 개혁이 진행된 것이 올해 행사의 특징이다. 우선 ㈜아모레퍼시픽 ‘헤라’가 공식 스폰서를 맡아 모든 무대 메이크업과 헤어를 협찬하면서 명칭도 ‘헤라서울패션위크’로 변경했다. 패션을 상징하는 실을 모티브 삼아 공식 로고도 만들었다. 파리·뉴욕·런던·밀라노 등 유명 패션도시의 백화점과 편집숍의 바이어, 미디어 관계자들을 대거 초대한 점도 눈에 띈다. 관록의 기성 디자이너와 반짝이는 신진 디자이너가 이끄는 총 66개 브랜드의 기량이 폭발하는 자리를 밀착 취재한 중앙SUNDAY는 가장 신선했던 ‘배달의 민족X카이’ 패션쇼와 총기 넘치는 젊은 디자이너 브랜드 8개를 분석했다. ?

오리콤 박서원 부사장, ‘배달의 민족’ 김봉진 대표, 디자이너 계한희.

배달의 민족 X 카이…‘한글’과 B급 문화가 만나다 이번 헤라서울패션위크에서 관객과 미디어의 호응도가 가장 높았던 것은 18일 오후 8시에 열린 ‘배달의 민족 X 카이(BAEMIN X KEY)’ 쇼였다. 모바일 배달 서비스 앱 ‘배달의 민족(이하 배민)’ 김봉진 대표의 “유럽 어느 길거리에서 한글이 쓰인 티셔츠를 입은 멋진 외국인 청년을 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듣고 오리콤 박서원 부사장이 계한희 디자이너를 섭외해 4개월 간 준비한 자리다.


이날 쇼에 등장한 옷의 한글 문구들은 기발했다. 김치는 드실 만큼만, 손대지 마시오, 아이가 타고 있어요, CCTV 작동중 등. ‘한글을 입은 패션’이라는 말에 윤동주 시인의 ‘서시’ 정도는 상상했던 관객들은 웃음이 터질 수밖에 없었다. ‘배달의 민족’이라는 중의적 상호명과 광고 등을 통해 B급 문화의 웃음코드를 선보였던 김 대표가 목표했던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도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안내 문구를 통해 ‘보는 재미’를 주자.

일부 옷에 프린트된 형형색색 안내판들은 김 대표가 도시 곳곳을 돌며 직접 찍은 사진들이다. “조형미가 뛰어난 한글을 패션이나 상품 개발에 응용하면서 너무 진지하게만 다룬 게 아닌가 생각했다. 한글을 재밌게, 맛있게 표현한다면 국내외 젊은이들의 관심을 모을 수 있지 않을까.”


그는 2002년 월드컵 때 태극기를 그린 티셔츠가 브라 톱, 숏 팬츠 등 과감한 디자인 상품으로 변신하고 젊은이들이 여기에 폭발적으로 반응하는 걸 보면서 ‘한글 디자인’을 기획했다고 했다. 디자이너 출신인 김 대표는 2012년부터 한나체, 도현체, 주아체 등의 한글 폰트를 개발하고 무료 서체를 배포해왔다. “젊은 세대와 ‘태극기’의 거리감이 줄어드는 걸 보면서 다양한 한글서체를 통해 많이 쓰고 보고 즐거워하다 보면 좀 더 다채로운 문화가 생성될 거라 생각했다.”


쇼를 기획한 오리콤 박서원 부사장 역시 “꼭 전통적인 옛 것만이 한국적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보는 안내 문구들을 통해 현재의 한국을 반영하는 것도 신선한 도전이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아름다운 한국어도 많은데 ‘웃음’을 위해 유치한 안내문구들을 써야 했는가라는 질문에는 “외국인이 보았을 때 그 문구의 의미까지 전달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우리도 때론 의미를 모르는 외국어로 가득한 옷을 입지 않느냐”며 “조형적 아름다움을 놓치지 않으려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오히려 그 뜻이 궁금해져서 어렵게 그 의미를 알아냈을 때, 그 나름의 재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답했다.


‘배달의 민족’이라며 옷을 만들고 싶다는 전화를 받았을 때만 해도 오토바이 배달원들의 유니폼을 생각했다는 계한희 디자이너는 “이상봉 선생님 같은 분이 이미 해온 작업이어서 매우 조심스러웠지만 1주일에 한 번씩 만나 콘셉트 회의를 하면서 ‘배민’이 추구하는 B급 문화에 빠져들었다”고 했다.


‘재밌으면서도 멋있는 옷’을 만들어보자는 의욕이 솟구친 계 디자이너는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스트리트 감각의 옷들을 만들면서 신체와 의상의 용도를 떠올리게 하는 문구들을 재치있게 새겨 넣었다. 점퍼 지퍼 부분에 있는 ‘난방중 문을 꼭 닫아주세요’, 여성용 브라 톱 가슴 부분에 있는 ‘기대지 마세요’라는 문구 등은 기발한 조합 때문에 절로 웃음이 난다. 그는 “문구는 흥미를 유발하고 재미를 주지만 옷 자체는 진지하게 만들었다”며 “레이저 커팅, 디지털 프린트, 자수 등 하이패션에서 사용하는 요소들을 많이 사용했다”고 했다.


이번 쇼를 지켜본 세계적인 패션 칼럼니스트 수지 멘키스는 “패션에 문자를 이용하는 건 자칫 진부해 보일 수 있는데 참신한 방법으로 풀어낸 것이 굉장히 신선하고 에너지가 넘쳐 보인다”고 평했다. 저명 패션 블로거 수지 버블 역시 “이번 헤라서울패션위크에서 본 패션쇼 중 가장 인상적이었다”며 “한국을 돌아다니며 나 역시 많이 본 문구들이 패션에 녹아 있어 매우 흥미로웠다”고 말했다. ‘배민 X 카이’ 의류는 일회성 이벤트로 따로 옷을 판매하진 않을 계획이다. ●


글 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 ?사진 헤라서울패션위크, 각 브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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