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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속으로] 자전거 체인링 시계, 호두 껍데기 향초 … 고물이 보물 되는 마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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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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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장민수 ‘리브리스’ 대표가 업사이클링을 위해 자전거 부품을 분해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②③ 자전거 체인링으로 만든 탁상시계와 벽시계. 3만~4만원. ④ 자전거 뒷바퀴를 굴리는 스프로킷을 활용한 탁상 조명. 6만원. ⑤ 자전거 프레임을 잘라 만든 연필꽂이. 2만~3만원. ⑥ 자전거 체인으로 포인트를 준 팔찌. 1만원. [신인섭 기자]

지난 21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철공소 골목에 자리 잡은 장민수(28)씨의 공방에는 자전거 부품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주변 공장의 기계만큼이나 장씨의 손이 바삐 움직였다. “어제는 아침 9시에 시작해 새벽 3시까지였으니 12시간 넘게 작업했네요.” 다음날 열리는 서울국제핸드메이드페어에 참가하기 위해 연일 밤샘작업을 하고 있다고 했다.

쓰레기 재활용 ‘업사이클링’ 바람

15㎡ 남짓한 그의 공방 곳곳엔 체인링·스프로킷·포크·체인·프레임 등 낡고 녹슨 자전거 부품들이 수북이 쌓여 있다. 장씨는 폐자전거를 분해해 얻은 각종 부품들로 조명등·시계·팔찌·병따개·연필꽂이 등을 만드는 ‘업사이클러(upcycler)’다. ‘다시(re)’와 ‘쓰레기, 파편(debris)’을 합해 만든 ‘리브리스(rebris)’란 업사이클 업체를 2년째 운영하고 있다. 그는 “서울에서만 한 해 수거되는 폐자전거의 양이 8000대에 달한다. 버려진 자전거를 업사이클링하면 고철이나 폐기물로 처리되는 과정에서 들어가는 비용과 환경오염을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장씨의 대표 상품은 시계다. 자전거 체인링(자전거 페달 부분 원형 톱니바퀴)에 아크릴 페인트로 색을 입히고 초침과 분침을 조립하는 등 모든 공정이 수작업으로 이뤄지는데 완성되기까지 꼬박 8시간이 걸린다. 그렇게 탄생한 탁상용 또는 벽걸이 시계들은 3만~4만원에 팔리고 있다. “헌것을 활용한 것치고 비싸다”란 지적이 있을 법하지만 장씨는 오히려 가격이 너무 싸다는 소리를 많이 듣는다고 했다. 시계에는 시침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무음 기능을 넣고, 조명은 상황에 따라 불 밝기를 다양하게 조절할 수 있게 하는 등 기성 제품에 뒤지지 않는 품질로 승부하는 데다 버려진 고물이 하나밖에 없는 보물로 바뀌는 과정을 스토리로 입혀 팔기 때문에 호응이 좋다는 게 장씨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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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함이 있어 버려지는 커피콩은 반지로, 피스타치오 껍데기는 팔찌로 업사이클링된다. 헌 책은 반지꽂이로 활용할 수 있다. 업사이클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소재만 200개에 달한다. [사진 이자인원오원]

 김유화(27)씨의 손을 거치면 버려지는 견과류 껍데기가 아기자기한 액세서리로 변한다. ‘이자인원오원’이란 업사이클 업체 대표인 김씨는 “딱딱한 견과류 껍데기는 동물 사료로 쓸 수 없어 음식물 쓰레기가 아닌 일반 쓰레기로 분류돼 태워진다. 이때 나오는 발암물질을 줄이자는 생각에서 견과류를 소재로 활용하게 됐다”고 말했다. 친환경적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피스타치오 껍데기 등은 원석에서 찾을 수 없는 자연스러움을 가져 액세서리 소재로 만점이라는 게 김씨 생각이다.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그는 신제품 성능을 시험하는 한 연구소에서 일하다 무더기로 버려지는 천을 활용해 가방을 만들기 시작한 게 계기가 돼 업사이클링에 뛰어들게 됐다. 김씨는 “멀쩡한 천이 쓰레기가 되는 게 아까워 집에 가져와 이것저것 만들었는데 주변의 반응이 좋았다. 많은 사람이 재미있는 놀이처럼 업사이클을 받아들이길 바란다”고 말했다. 버려지는 커피콩도 김씨가 애용하는 소재다. 결함이 있어 먹기 어려운 결점두를 활용해 귀걸이나 반지로 만들어 파는데 디자인이 독특할뿐더러 콩에 배어 있는 커피향이 더해져 ‘여심 공략’에 제격이다. 영화 포스터에 코팅액을 입혀 만드는 종이비즈 팔찌나 버려진 안경알을 활용한 브로치, 호두 껍데기나 한라봉 껍질로 제작하는 향초도 인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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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양각색의 ‘업사이클링(upcycling)’ 제품이 주목 받고 있다. 업사이클링은 버려지는 소재를 비슷한 용도로 다시 쓰는 ‘리사이클링(recycling)’에서 나아가 디자인과 가치를 입히는 한 단계 높은 개념의 재활용이다. 한국업사이클디자인협회에 따르면 업사이클 업체 수는 지난해 40여 개에서 최근 100개까지 늘었다. 업사이클디자인협회가 추산한 지난해 말 기준 업사이클 시장 규모는 40억원이다.

과거엔 소수의 환경 운동가가 중심이 되면서 제품성이 다소 떨어졌지만 최근에는 소재 가공의 노하우를 가지고 있는 전문가 디자이너들이 많이 뛰어들어 업사이클링된 제품의 질이 높아졌다. 특히 개성과 윤리적 소비를 중시하는 경향과 맞물리면서 젊은 층에서 인기를 얻고 있다. 실제 업사이클디자인협회가 2013년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업사이클 제품을 선호하는 이유로 소비자들은 ‘친환경적’(41%)이고, ‘세상에 하나뿐인 제품’(33%)이란 점을 댔다. 업사이클링 활용 소재군도 다양해졌다. 초창기 때만 해도 버려지는 종이나 천 등이 고작이었지만 바닷가에 버려져 파도에 마모된 유리, 버려진 낙하산 등 활용 가능한 소재만 200개에 달하고 새로운 재료들을 발굴하는 작업도 꾸준히 이뤄지고 있다.

 업사이클러들은 대부분 20~30대의 젊은 층으로 한 명이 사실상 가내수공업 형식으로 운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박미현 업사이클디자인협회장은 “아이디어가 많고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일을 부담 없이, 재미있게 하길 원하는 젊은 층이 관심을 많이 갖는다”고 말했다. 아직 규모가 영세한 업체가 많지만 오랜 기간 꾸준히 성장해 꽤 덩치가 커진 업체도 있다. 2008년 3명으로 시작해 현재는 11명의 직원을 거느린 ‘터치포굿’이 대표적이다. 터치포굿은 어쩔 수 없이 발생되는 기업들의 폐기물을 거둬들여 업사이클링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한 대기업 주최의 마라톤 행사에서 버려진 수천 개의 생수 페트병을 녹여 담요로 만들어 되돌려 주는 캠페인을 진행했다. 대기업이 업사이클에 뛰어든 경우도 있다. 코오롱인더스트리는 ‘래코드(RE;CODE)’란 패션 브랜드를 론칭해 업사이클 제품을 만들고 있다. 소각될 처지에 놓인 옷과 군에서 쓰던 텐트·군복·낙하산 등으로 제작한 가방과 옷을 판다.

 정부도 업사이클링 바람에 주목하고 있다. 업사이클링은 쓰레기 매립량을 줄이는 새로운 자원 순환 방식이기 때문이다. 환경부에 따르면 하루 버려지는 생활쓰레기는 약 4만8000t이다. 이 가운데 소각되거나 재활용되는 양을 제외하고 땅에 묻히는 쓰레기만 7600t이다. 환경부 관계자는 “매립되는 쓰레기의 56%는 업사이클링 등을 통해 추가로 재활용될 수 있는 자원”이라며 “재활용 자원의 매립을 없애는 것만으로도 1100억원의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고 말했다. 환경부는 열악한 업사이클링 활성화를 위해 정책적 지원도 마련하고 있다. 우선 서울과 경기·인천·대구 등에 거점 업사이클링 종합센터를 운영할 계획이다. 소재 발굴과 가공·마케팅·판매까지 홀로 도맡아야 하는 영세한 업사이클링 업체의 안정적인 활동을 돕기 위한 인프라 구축 차원이다. 센터 안에는 공방과 판매장소뿐 아니라 각종 소재를 공급할 소재은행 등이 갖춰질 예정이다. 업사이클 업체 관계자는 “산업 발전을 위해선 공공의 지원뿐 아니라 해외처럼 민간 투자가 더해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S BOX] 폐품 활용한 스위스 ‘프라이탁’ 가방 인기 … 전 세계에 460개 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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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사이클링 업체가 국민 브랜드로 자리 잡은 경우도 있다. 업사이클링 선두 주자로서 국내 업체들의 롤모델인 스위스 ‘프라이탁(Freitag·사진)’이 대표적이다. 1993년 다니엘 프라이탁과 마커스 프라이탁 형제가 설립한 프라이탁은 쓰다 버린 트럭 덮개 천과 폐자동차 안전벨트로 가방을 만들어 판다.

프라이탁 형제는 비가 와도 가방이 젖지 않는 방법을 고민하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트럭의 방수 덮개에서 힌트를 얻었다. 자동차 안전벨트를 활용해 어깨끈을 만들고 폐자전거 고무 튜브는 가방의 모서리 부분을 처리하는 데 쓴다. 이렇게 만들어진 프라이탁 가방은 자전거족 사이에서 빠르게 인기를 끌었고 이제는 국민 80% 이상이 갖고 있을 정도로 대표 브랜드가 됐다. 프라이탁이 1년간 사용하는 재료는 방수천 350t, 자전거 튜브 1만8000개, 차량용 안전벨트 15만 개다. 30만원 안팎의 고가임에도 매년 20만 개씩 팔린다. 스위스를 넘어 전 세계 곳곳에 460개의 매장을 두고 있다.

핀란드에서 2001년 론칭된 ‘글로베 호프(Globe Hope)’도 인기다. 낡은 군복과 광고 현수막, 병원 이불, 보트의 돛 등 병원이나 군대에서 버린 옷감을 주재료로 해 가방과 핸드백을 만든다. 1960년대 베트남 전쟁 당시 떨어진 폭탄을 활용하기도 한다. 폭탄을 녹여 숟가락을 만들었던 라오스 장인 12명과 미국 디자이너가 함께 참여하는 ‘피스밤(Peacebomb)’이 그렇다. 이들이 폭탄으로 제작한 목걸이와 팔찌 등은 20여 개국에서 팔린다.

황수연 기자 ppangsh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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