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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한·미 정상회담 디딤돌로 남북관계 탄력 받아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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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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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욱
통일연구원장

지난 17일 한·미 정상회담을 보면서 미국 최고위급 인사들의 과거 발언들이 떠올랐다. 2013년 9월 척 헤이글 국방장관은 한·일 관계를 염두에 두고 “역사와 안보 문제를 잘 구분해야 한다”고 말했다. 2013년 12월 바이든 부통령은 한국의 대중국 관계를 의식한 듯 “미국 반대에 베팅하는 것은 좋은 베팅이었던 적이 없다”고 했다. 2014년 4월 오바마 대통령은 “한국의 대중국 경제협력을 환영하지만 한국 안보의 기초는 미국”이라고 강조했다.

 위의 발언들과 비교하면 이번 한·미 정상회담은 양국 관계에 대한 우려를 불식하고 강력한 한·미 동맹을 재확인한 것으로 평가할 만하다. 척 헤이글 장관에 이어 국방장관을 맡은 애슈턴 카터 장관은 펜타곤을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을 21발의 예포와 의장대 사열로 맞이했다.

 바이든 부통령은 아시아 국가 수반으로는 처음으로 박 대통령을 관저로 초대하고 현관까지 나와 마중했다. 그는 2년 전 자신의 발언을 취소라도 하듯이 한·중 관계 발전을 지지한다고 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한국의 통일 비전뿐 아니라 통일 과정에서 한국의 주도권을 지지했다.

 이러한 미국의 극적인 태도 변화는 미국이 한국의 통일에 대한 전략적 로드맵에 대해 이해하고 신뢰한 것도 있지만, 한국의 통일 준비가 아시아에서 미국의 전략적 이해와 상충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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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전략적 로드맵과 관련해 미국은 핵심 사항에 대해 공감을 표시했다. 우선 한·미 양국은 북한에 대한 상황 인식을 공유하고 대북정책 공조를 과시했다. ‘북한에 관한 한·미 공동성명서’를 통해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은 유엔안보리 결의의 상시적인 위반이며 북한이 탄도미사일이나 핵실험 시 유엔안보리의 추가 제재 등으로 대가를 치를 것이라고 경고했다. 두 정상은 북한의 핵과 미사일 능력의 지속적인 고도화에 대해 우려하고 북핵 문제를 최고의 시급성과 의지를 갖고 다루기로 했다.

 둘째로 통일 문제와 관련해 미국은 한국의 남북대화 노력과 드레스덴 구상 등을 지지했으며 통일에 유리한 환경을 만들기 위한 한·미 고위급 전략회담에 합의했다.

 셋째로 소위 한국의 대중국 경사론과 관련해 미국은 남북통일 과정에서 중국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한국의 입장에 대해 공감을 표시했다. 한국이 제안한 동북아평화협력구상에 대한 지지를 표명한 것은 동북아에서 평화적인 협력과 북한 비핵화에 대한 중국의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촉구하는 한국의 노력을 인정한 것이다. 미국은 다음 주 개최되는 동북아평화협력구상 회의에 지난해보다 급을 한 단계 높여 성 김 부차관보를 대표로 보내기로 했다.

 미국이 한국의 입장만 들어준 것은 아니다. 미국 입장에서는 아시아 중시 정책(Rebalance to Asia)에 대해 한국의 지지와 동참을 확인함으로써 한·미·일 군사협력의 틀을 유지한 게 큰 소득일 것이다. 특히 다음달 초 한·중·일 정상회담 개최와 함께 한·일 정상회담 계획을 박근혜 대통령이 공표한 것 역시 미국의 한·일 관계 개선 요구에 화답한 것이다.

 또한 한·미 동맹이 한반도를 넘어 글로벌 파트너십으로 확대된 것 역시 미국으로서는 성과라고 할 수 있다. 한·미 두 정상은 양국 간 협력의 대상을 사이버 안보, 우주, 에너지, 환경 등 ‘뉴프런티어’로 확장하기로 합의했다.

 요컨대 이번 한·미 정상회담은 양측 모두에게 만족스러운 결과를 도출했다고 할 수 있다. 많은 우려에도 불구하고 이번 한·미 정상회담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이 일관되게 원칙을 견지하며 통일전략을 추진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북핵 문제에도 불구하고 대화의 끈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한국의 대북 원칙을 미국이 받아들임으로써 대북정책 공조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한국 입장에서 가장 큰 성과는 미국이 한국의 통일정책을 지지하고 한국의 주도적 역할을 인정한 것이다. 나아가 한국의 통일 노력에 미국이 동참을 약속한 것이다. 북한이 북핵과 미사일 실험에 대한 경고와 북한 인권문제에 대한 책임을 언급한 것에 대해 반발할 가능성도 있으나, 미국이 전략적 인내에서 벗어나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에 나서기로 한 것은 남북관계에 반드시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실제 한·미 양국은 채찍과 함께 북한이 호응할 경우 당근도 보여주었다. 한·미 양국은 북한에 대한 적대정책을 갖고 있지 않으며, 북한이 핵과 미사일 포기를 결정할 경우 밝은 미래를 약속할 것임을 천명했다.

 8·25 합의로 모처럼 찾아온 남북 간 대화 모드는 이번 한·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한층 더 탄력을 받게 되었다.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본격 가동할 수 있는 기회가 열린 것이다. 통일 과정에서 늘 다양한 가능성을 대비해야겠지만 지금은 기회를 포착하는 지혜와 그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결단력이 필요한 때다. 북한 정세에 대한 정확한 분석의 중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커지고 있다.

최진욱 통일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