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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의 풍경화 베꼈다 지우니, 추상화가 되었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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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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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게인즈버러(1727∼88)의 유화 ‘저녁 풍경’(1771·왼쪽)을 알루미늄판 위에 그대로 그린 뒤 전기 사포로 한순간에 갈아 없애 잔상만 남긴 토비 지글러의 ‘Control Z’(2015). [사진 PKM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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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루미늄판 위에 뭉게뭉게 올라온 잔상 같은 이미지를 보고 뭘 그렸는지 묻는다면, 영국 화가 토비 지글러(43·사진)는 “게인즈버러의 풍경화”라고 답할 것이다. 지글러는 18세기 영국 화가인 토머스 게인즈버러가 1771년 완성한 ‘저녁 풍경-농부들과 말을 탄 사람들’을 몇 주에 걸쳐 알루미늄판 위에 그대로 옮겨 그렸다. 그리고는 전기 사포로 이를 한순간에 갈아 없앴다. 일껏 그린 것을 그는 왜 지워버렸으며, 그걸 왜 전시할까.

영국 화가 토비 지글러 개인전
알루미늄 질감 살린 회화 등 10점
이미지 생성·소멸, 해방감 선사

 “미대 졸업 후 위기가 왔다. 그림의 역사는 너무도 길고 크고 무거워 나는 뭘 어떻게 그려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전통적 기법으로 그린 뒤 한번에 다 지움으로써 회화의 역사가 주는 중압감을 떨치고 싶었다.”

 그린 것을 갈아 없애면서 그는 자유와 해방감을 느꼈을까. “모든 걸 잃을까봐 두려웠다. 그림은 아주 아날로그적인 느린 과정으로 이뤄졌다. 그러나 너무 빨리 지워졌다.”

 서울 삼청로 PKM갤러리에서 다음달 8일까지 열리는 그의 개인전에는 알루미늄의 질감이 살아 있는 회화와 조각 10점이 출품됐다. 이 중 회화는 모두 게인즈버러의 풍경화를 모티브로 삼았다. 게인즈버러는 풍경화의 거장이다. 지글러는 “그의 그림은 영국 풍경화의 전형으로, 그림이 지워지더라도 풍경화의 구조는 남아 있을 듯해 이 이미지를 선택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게인즈버러의 그림을 실제로 보지는 못했다. 컴퓨터로 찾은 이미지의 주조색을 조금씩 바꿔가며 그리고 지웠다. 그는 “인간은 어떤 추상적 이미지를 접해도 거기서 구상적인 무언가를 떠올리고 그걸 구현하려고 노력한다”며 “그림이 원래 맥락에서 벗어나 미술관에 옮겨져 전시되는 것과 비슷한 일”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또 게인즈버러 풍경화의 톤을 조금씩 바꿔 구글에 검색한 뒤 그 결과로 나온 이미지들을 포스터로 출력해 전시장에 쌓아뒀다. 그림을 미색 톤으로 바꾸니 국수·만두 따위가, 분홍 톤으로 바꾸니 피부 질환 관련 사진이 유사 이미지로 잔뜩 검색됐다. “화면의 여러 디테일이 나타났다 없어지듯, 회화의 긴 역사 동안 많은 이미지들이 생성과 소멸을 거듭했다”고 설명하는 이 젊은 화가는 역사에 기대면서도 거기 짓눌리지 않는 법을 터득한 듯하다.

토비 지글러는 1994년 런던의 센트럴 세인트 마틴 예술학교를 졸업했다. 런던 테이트 브리튼, 디종 르 콩소르시엉 등 유수의 미술관 전시에 참여했다. 02-734-9467.

권근영 기자 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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