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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 요약 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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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8호 1 면

1930년대 식민지 한국에는 금광 열풍이 일었고, 그 대표주자가 광산재벌 최창학이었다. 조선의 광산왕, 황금귀(黃金鬼) 등으로 불린 최창학은 식민지 한국인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만큼 여러 면에서 기존 부호들과는 달랐다. 언론인 류광렬이 『삼천리』 1931년 2월호에서 ‘민영휘는 세도바람에 치부한 권세가, 김성수는 호농(豪農)의 후예로 누(累)백만의 재산을 세습한 행운아’로 사뭇 박하게 평가하면서도 최창학에 대해서는 “자타가 다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적빈여세(赤貧如洗: 물로 씻은 듯이 가난함)한 가정에서 태어나 갖은 고초와 신산(辛酸)을 고루고루 맛보다가 하루아침에 졸부가 된 말하자면 제3계급에 속하는 극히 미천한 불운아”라고 우호적으로 평가한 것이 이를 말해 준다. 천도교에서 발행하던 『개벽』의 뒤를 이은 『별건곤』은 1932년 11월호에서 “벼락부자, 벼락부자 하지만 근래 조선사람으로 이 최창학 군처럼 벼락부자가 된 사람은 없을 것이다”라고 평가하고 있는데, 그야말로 돈도 벌고 명성도 얻은 행운아였다.


오수산은 『별건곤』에서 최창학의 삼성금광에서는 금이 쏟아져 몇 달 만에 수백만원의 거부가 되었다면서 이를 미쓰이(三井會社)에 300만원에 팔아서 일약 600만원의 재산을 소유한 거부가 되었다고 전한다. 최창학의 재산 규모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해 『삼천리』(1931. 2월)에서 언론인 김을한은 최창학의 재산을 300만원으로 적고 있는 반면 ‘동아일보’는 1929년 ‘최창학의 광산에는 광부 수천 명과 사무원 수십 명이 있었는데 하루에도 수만원씩 황금덩이(黃金塊)를 캐어서 오륙 년 동안에 최창학을 5백만원의 거부로 만들었다’면서 500만원대 부자라고 평가하고 있다.


당시 금광으로 일확천금의 꿈을 이룬 사람은 조선일보사를 인수한 방응모(方應謨)를 비롯해 김태원(金台原), 방의석(方義錫), 박용운(朴容雲) 등 여러 사람이 있었다. 삼천리 1934년 8월호는 금광업계의 내부 정보 보도를 인용해 10만원대 금광 매매가 87건에 달한다고 말하면서 “예전에는 금광꾼이라고 하면 미친놈으로 알았으나 지금은 금광 안 하는 사람을 미친놈으로 부르리만치 되었다”면서 “웬만한 양복쟁이로 금광꾼 아닌 사람이 별로 없다”고 말하고 있다. 많은 사람이 잿빛 식민지의 탈출구로 여겼던 일탈된 황금광 시대였다.


1932년 여름, 한반도 최북단 함경도 청진(淸津)과 웅기(雄基) 땅값이 들썩거렸다. 오지였던 관북(關北:함경도)의 땅값이 들썩거린 것은 대륙 진출의 관문(關門)으로 유력시된다는 정보 때문이었다. 일제는 1928년 10월께부터 대륙 침공을 목적으로 만주의 길림(吉林)과 함경도 회령(會寧)을 잇는 길회선(吉會線) 철도를 부설했는데, 이를 연장하는 동해의 종단항(終端港)을 만들겠다는 계획이었다. 종단항은 1932년 3월 건국된 만주국 진출의 관문이 될 것이었다. 이전에는 주로 요동반도 대련(大連)이 일본과 만주 사이의 중간기지 역할을 했지만 동해의 종단항을 세워 그 역할을 대신시키겠다는 뜻이었다. 일제는 드디어 그해 8월 25일 종단항을 발표했는데 정작 선정된 곳은 청진도 웅기도 아닌 청진 동쪽의 나진(羅津)이었다. 나진은 함경북도 경흥군 신안면에 소속되어 있던, 불과 20호 미만의 작은 어촌(漁村)이었다. 그곳에 갑자기 거센 부동산 광풍이 불었다.


『동광』 1932년 11월호에 이윤재(李允宰)는 청진과 웅기 기행문을 실었다. “내가 청진에 도착하기는 8월 중순. 그리고 경성(鏡城)에 갔다가 일주일쯤 뒤에 도로 청진에 들러 웅기항에 이르렀다. 이때 웅기의 전시가(全市街)는, ‘땅!’, ‘돈!’ 하는 소리로 가득 찼다.” 이윤재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1평에 불과 2전, 3전 하던 것이 지금은 일약 10원, 20원까지 올랐다’고 덧붙였다. 몇몇 곳은 30, 40원으로 뛰기도 했으니 삽시간에 무려 수천 배가 올랐던 것이다.


함경도 부령(富寧)의 한미한 농가에서 태어난 김기덕은 청진으로 이사한 뒤, 조선과 러시아, 만주를 잇는 국제무역에 뛰어들어 기반을 닦았다. 김기덕은 해산물·목재 무역을 계속하면서 부동산에 뛰어들었다. 비록 오지이지만 석탄과 목재와 해산물이 풍부한 북관의 미래를 낙관한 그는 상공업의 요지가 될 만한 부동산을 미리 사서 파는 수법으로 백만장자가 되었다. 그는 나진과 웅기를 주목해서 웅기에 300만 평, 나진에 150만 평의 토지를 샀다. 나진항을 감싸는 천혜의 방파제 역할을 하는 대초도(大草島) 80만 평과 소초도(小草島) 40만 평도 몽땅 사들였다. 김기덕은 운도 좋았다. 일제는 나진항 건설을 발표하면서 거의 절반의 토지를 수용했지만 김기덕이 소유한 간의동(間依洞), 신안동(新安洞)에는 되레 시가지가 조성될 예정이었고, 공업지대 예상지에도 막대한 토지가 있었다. 그가 가진 450만 평의 토지를 평당 2원으로 계산하면 900만원이고, 5원씩 계산하면 4500만원으로 조선 제일의 부호로 등극한 것이다.


함북 경성(鏡城) 출신의 홍종화 역시 한미한 농가의 아들로 태어나 망국 전 경성에 있던 함일(咸一)학교와 경일야학(鏡一夜學)에서 공부하다가 학교가 강제로 문을 닫자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가 주목한 것은 일본군 군수품(軍需品)이었다. 조선에는 용산(龍山)의 20사단과 함북 나남(羅南)의 19사단이 있었는데 홍종화는 나남의 19사단을 주목했다. 홍종화는 나남 군영지(軍營地) 부근의 토지와 일반 주민이 거주할 만한 토지를 매수하는 한편 군수품을 납품하는 용달상(用達商)으로 나섰다. 홍종화는 나남사단에 군수품을 납품하면서 차츰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수만원을 모으자 북선일일신문(北鮮日日新聞)도 경영했다. 홍종화는 군사적 관점에서 경제를 바라보면서 부동산 사업에 나섰다. 일본이 러시아의 부동항(不凍港)인 블라디보스토크에 필적할 군사도시를 북관에 세울 것으로 예상하고 천연 지리가 동양 제일이라는 나진만(羅津灣)을 주목했다. 홍종화가 전 재산을 기울여 웅기와 나진 지역의 토지를 매입했다. 1931년 9월 일본군이 만주사변을 일으키자 홍종화는 살던 집까지 금융조합에 전당잡히면서 나진과 웅기의 토지를 매입했다. 홍종화의 소유 토지 규모는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었지만 대략 500만 평이 넘는다고 예상했다. 평당 2원씩 잡아도 1000만원인데 종단항 발표 후 나진에 평당 30, 40원을 호가하는 토지가 다수 생겨났으니 김기덕과 함께 조선 제일의 부자가 된 것이다. 게다가 만철(滿鐵:만주철도)에서 1933년 4월부터 1년 동안에만 1700만원을 투자해서 나진에 시가지와 부두를 건설할 계획이라고 발표하자 땅값은 더욱 폭등했다.


1933년 2월 24일 국제연맹은 일본군의 만주 철수 권고안을 42대 1로 채택했고 일본은 연맹을 탈퇴했다. 만주 특수에 도취된 일본인들은 연맹 탈퇴를 오히려 환영했다. 자본주의가 덜 발달했던 일본 경제는 전쟁을 통해서만 성장할 수 있었다.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의 맹점이 여기에 있다. 일본 자본주의는 조직폭력배가 민간인의 돈을 갈취하는 착취경제와 같았다. 그렇게 일제는 확전의 길로 나가서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일으켰고 ‘패주’하고 말았다. 그런 침략의 떡고물 일부가 일시나마 관북의 부동산 붐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김응수와 방의석은 자동차 영업, 즉 운수업으로 성공한 부호들이었다. 김응수는 평안북도에서 자동차 운수업에 뛰어들어 10년 내외에 수십만원의 자산가가 되었는데, 금광이 아닌 분야에서 부를 움켜쥔 특이한 경우였다. 조선에서 자동차 영업은 1917년 민영휘의 아들 민규식이 시작했다고 전해지지만 정작 운수업으로 성공한 사람들은 만주로 가는 길목이었던 평안도, 함경도 사람들이었다.


김응수는 운수업에서 번 돈으로 평양에 백화점을 지었다가 큰 손해를 본 반면 방의석은 운수업으로 서울까지 진출했다. 방의석은 객주(客主) 사환으로 출발해 거부가 되었는데 이런 경력 때문인지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부도 많이 했다. 하지만 1941년에 중추원 참의가 돼 이른바 ‘황군(皇軍) 위문’을 다녀온 뒤 ‘신동아의 새 광경을 감격으로 목도’ 운운(삼천리 1941년 3월호)하는 친일파로 전락했다가 해방 후 반민특위에 의해서 수감되기도 했다. 일제 군대가 계속 욱일승천해야 만주로, 중원으로 뻗어나갈 수 있었던 식민지 운수업의 한계였다.


대일 항쟁기 때 일본인 상인들이 터를 잡은 곳은 혼마치(本町:충무로) 진고개 일대였다. 1930년대 진고개에 들어서면 조선이 아닌 일본으로 여행 온 듯한 느낌이 든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백화점과 상점들이 즐비했다. 우세한 자본력의 일본인 상점들이 점차 북촌까지 잠식하면서 한국인 상점들은 동대문과 서대문 쪽으로 밀려나는 형세였다. 이런 조선 상계(商界)에 혜성같이 등장했던 두 상인이 동아부인상회(東亞婦人商會)의 최남(崔楠)과 화신상회(和信商會)의 박흥식(朴興植)이었다.


1895년 경기도 양주에서 출생한 최남은 금광왕의 꿈을 안고 일본의 아키타 광산(鑛産)학교에 다니다가 귀국해서 광산에 들어갔다. 광산을 그만둔 최남은 운 좋게 조선상업은행에 들어가 은행원이 되었다. 그는 서울 다른 지역 4, 5곳에도 덕원상회 지점을 냈으며 경영난에 빠진 동아부인상회를 인수한 후에는 대구·광주·순천 등 지방 7~8곳에도 지점을 내는 새로운 경영기법을 선보였다. 그는 1934년 9월호 『삼천리』에 직접 쓴 ‘백화점·연쇄점의 대항책’이란 글에서 덕원상회의 성공 비결을 공개했는데 “그때 서울 상인치고 누구 하나 직접 사입(仕入:구매)하는 이는 없이 모두 진고개 상인(일본 상인)들에게서 도매(都賣) 맡아다가 파는 것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나는) 사입을 싸게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대판(大阪:오사카)으로 들어갔다”고 말하고 있다. 중간 단계를 배제한 직접구매로 단가를 낮춘 것이 성공 배경이란 뜻이다. 그러나 종로의 조선 상인들은 최남을 배척했다. 소매상조합(小賣商組合)에서 최남을 제외시킨 것이다. 그것이 최남에게는 전화위복이 돼 1926년 순종의 인산 때 기록적 매출을 올렸다. 최남은 일본인 백화점에 맞서기로 결심하고 1931년 종로에 동아(東亞)백화점을 열었다. 하지만 1932년 7월 조선호텔에서 박흥식과 회동한 최남은 동아백화점을 박흥식에게 매도하겠다고 발표해 큰 충격을 주었다. 박흥식은 이때 겨우 29세였다. 박흥식의 화신백화점은 승승장구해서 1933년에는 320명의 점원에 하루 평균 1만 명이 찾아 적을 때는 3000∼4000원, 많을 때는 1만7000원까지 팔면서 ‘근대 백화점의 왕’이라고 불렸다. 박흥식은 화신백화점과 전국적 프랜차이즈 회사인 화신연쇄점, 선일지물회사, 대동흥업(大同興業)주식회사, 선광인쇄(鮮光印刷)회사 등으로 계열사를 확대하면서 재벌로 떠올랐다. 1935년 화신백화점 대화재로 50만원의 손실이 발생했지만 1937년에는 지하 1층, 지상 6층의 최신식 건물을 준공해 남촌의 일본인 백화점에 당당히 맞서면서 “조선에선 박흥식이 실업가로는 제1인자”라는 말을 들었다. 박흥식은 미모의 부인 계씨(桂氏)와 재혼했는데 민세(民世) 안재홍(安在鴻)의 주례에다 혼인식 장소가 비행기여서 다시 장안에 화제를 뿌렸다.


일제가 군국주의로 치닫던 1940년대에는 동양척식회사 감사가 되고 조선비행기회사를 설립했다가 해방 후 반민특위에 구속되기도 했다. 군수산업으로 성장하려 했던 식민지 기업인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난 셈이었다.


- 이덕일,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제298호 2012년 11월 25일, 제299호 2012년 12월 2일, 제300호 2012년 12월 9일, 제301호 2012년 12월 16일.


제 298 호 | 2012.11.25


http://sunday.joins.com/archives/42530


제 299 호 | 2012.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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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00 호 | 2012.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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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01 호 | 2012.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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