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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렌코어에 리먼의 그림자가 어른거려

중앙일보

입력

'불신의 파도'가 시장에서 출렁이면 약점을 지닌 선박은 침몰한다. 이때 배 크기는 중요하지 않다. 2008년 9월 리먼브러더스가 세계 3위 투자은행이었는데도 난파됐다. 그리곤 7년이 흘렀다. 불신의 파도가 다시 일렁이고 있다. 이번엔 금융시장에서가 아니다. 상품(원자재)시장이다.

이미 침몰 후보가 모습을 드러냈다. '원자재 공룡'으로 불리는 스위스 글렌코어다. 금·다이아몬드에서 원유·구리·철광석까지 온갖 상품을 생산·배달·트레이딩(자기자본 투자)하는 곳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BP(영국석유) 등이 원유 가격에 영향을 거의 주지 못하지만 글렌코어가 원자래를 매매하면 원유·금·구리·다이아몬 가격에 직결된다"고 소개했다.

글렌코어는 1000억 달러(약 120조원)의 빚이 있는데 현찰은 거의 바닥났다. 올 6월 말 현재 글렌코어 금고에 남아 있는 현금자산은 28억 달러를 조금 웃돈다. 경제매체인 비즈니스인사이더는 "글렌코어가 전 세계 상품시장에서 사고파는 자산 규모에 비춰 28억 달러 정도는 아주 적은 돈"이라고 했다. 글렌코어의 자산은 1500억 달러 이상이다. 덩치에 비해 현찰 보유액은 쥐꼬리만하다. 7년 전 리먼의 상태와 엇비슷하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파산 직전 리먼은 필사적으로 증자에 나섰다"며 "글렌코어도 최근 증자해 25억 달러 정도를 조달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글렌코어는 여전히 현금 부족상태다. 불신의 파도가 일렁일 수밖에 없는 조건이다.

톰슨로이터는 "글렌코어 생존이 의심스러워지면서 주가와 채권 값이 폭락하고 있다"고 전했다. 지난달 28일(현지시간)에는 주가가 30%나 빠졌다. 하루만에 시가 총액이 35억 파운드(약 6조 3600억원)나 사라졌다. 29일(현지시간) 일시적으로 주가가 11% 정도 반등했지만 글렌코어를 향한 불신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원자재값 하락은 중국 경제 및 세계 경기와 맞물려 있다. 중국 경제의 성장세가 둔화하고 세계 경제가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자 글렌코어는 직격탄을 맞았다. 현재 원유뿐 아니라 구리·철광석·석탄·금 등 글렌코어가 취급하는 거의 모든 원자재 가격이 추락 중이다. 수퍼 사이클(Super Cycle)의 종언이다. 좋았을 때엔 글렌코어의 한 해 순이익이 수십억 달러에 이렀지만 올해엔 적자가 예상된다.

그 바람에 또 하나의 괴물이 고개를 들 조짐이다. '거래상대(Counterparty) 리스크'다. 글렌코어와 원자재 매매 계약을 맺은 업체들이 "과연 글렌코어가 계약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을까"라는 의심을 하게 된다. 이 의구심이 커지면 글렌코어의 핵심 비즈니스인 원자재 현물·파생상품 매매가 줄어들게 된다. 이는 파산으로 가는 길이다. 톰슨로이터는 "리먼이 막판에 거래상대로서 불신받아 끝내 파산했"고 전했다. 글렌코어의 파산은 세계 원자재 시장에 엄청난 혼란을 줄 전망이다. 원자재 시장이 패닉에 빠질 수 있다. 가뜩이나 어려운 세계 경제에 시커먼 먹구름이 더 몰려 온다는 의미다.

최고경영자(CEO)인 이반 글라센베르그는 "빚을 줄이기 위해 적절한 조치를 취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시장에선 이미 글렌코어 떨이 자산 리스트가 나돌고 있다. 블룸버그는 "글렌코어 자산 가운데 구리광산이 가장 인기 있어 보인다"며 "중국이 유력한 매수자가 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문제는 자산 매각이 원하는 시기에 원하는 만큼 될 수 있느냐다. 톰슨로이터는 "리먼이 자산을 제 때 제 가격에 팔지 못해 끝내 손을 들었다"고 했다.

여기에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가 양적 완화(QE)의 반대인 양적 긴축(QT)에 나설 움직임이다. 글렌코어는 유동성 풍년 시기에 저금리 자금을 마구 끌어다 원자재 파생상품 투자 등에 썼다. 이는 리먼이 저금리 자금을 끌어다 서브프라임 관련 파생상품에 베팅한 것과 비슷한 장면이다. 글렌코어 사태는 국제통화기금(IMF)이 29일 경고한 유동성 증발 순간 기업파산 사태가 어떨지를 미리 맛보게 하는 전주곡이 될 수 있다.

강남규 기자 dismal@joongang.co.kr

☞글렌코어=유대계 '석유왕' 마크 리치가 1974년에 세운 원자재 트레이딩 회사. 애초 회사이름은 마크리치였다. 설립자 리치는 인종차별로 교역봉쇄 중인 남아공이나 소련의 권력자들과 뒷거래를 서슴지 않았다. 탈세 혐의로 기소될 듯하자 미국을 떠나 스위스로 망명했다. 93~94년 아연에 베팅했다가 1억7000만 달러를 날렸다. 회사 지분을 제자인 이반 글라센베르그(현 CEO) 등에게 넘길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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