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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열도에 울려퍼진 분노의 함성

중앙일보

입력

일본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을 향한 분노의 함성이 19일 새벽까지 일본 열도 곳곳에서 울려 퍼졌다. 도쿄 지요다(千代田)구에 위치한 국회의사당은 ‘안보법안 무효’ ‘아베 정권 퇴진’을 외치는 시위대로 둘러싸였다. 경찰은 의사당과 시위대 사이에 버스로 벽을 만들었다. 인도를 가득 메운 시위대는 차도까지 진출했다. 시위대와 경찰의 몸싸움이 빚어지기도 했다. 안보법안 반대 단체 회원들과 직장인·학생·노인 등 4만여 명이 ‘반아베 시위’에 동참했다. 오사카(大阪)·나고야(名古屋)·삿포로(札幌) 등 전국 곳곳에서 항의 집회가 이어졌다.

전쟁의 공포와 상흔을 고스란히 간직한 히로시마(廣島) 원폭 돔 앞에서는 ‘NO! 전쟁법’이라고 적힌 펼침 막을 든 원폭 피해자와 유가족 등 1100명이 시위를 벌였다. 히로시마 원폭피해자단체협의회 사쿠마 구니히코(佐久間邦彦·70) 이사장은 "전쟁에서 핵무기가 사용될 가능성도 있다. 용서할 수 없다"고 했다. 나가사키(長崎) 피폭자 5개 단체는 “그 전쟁을, 그 원폭피해를 다시 한번 국민에게 체험하라고 하는 것인가”라는 분노의 성명을 발표했다. 주부 야마시타 교코(山下享子·59)는 "두 손자를 전쟁에 휘말리게 할 수 없다”며 법안 폐기를 촉구했다.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에도 국회 앞에는 아침부터 법안 강행 처리에 반대하는 시위대가 모여들었다. 42세 남성 회사원은 “항의의 뜻을 표시하기 위해 오전 일을 쉬고 시위에 동참했다”고 말했다. 74세 할아버지는 “세 살 때 공습을 피하기 위해 할아버지가 전등불을 검은 덮개로 가리는 걸 본 기억이 있다”며 “내 손자에게는 그런 전쟁 경험을 물려주고 싶지 않다”고 강조했다. 중견 배우 이시다 준이치(石田純一·61)는 이틀 연속 국회 앞 집회에 참석해 "우리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면 정치가로서 상당히 감각이 나쁜 것"이라며 “우리가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헌법 전문가인 히구치 요이치(?口陽一) 도쿄대 명예교수는 "헌법뿐만 아니라 일본 사회의 뼈대가 위험하다"고 지적했다.

집단적 자위권을 골자로 한 안보법제가 자위대원은 물론이고 해외에 파견된 비정부기구(NGO) 활동가들까지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는 우려도 나왔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재건 활동을 돕고 있는 NGO 단체 ‘페샤와르회’의 현지 대표인 의사 나카무라 데쓰(中村哲·69)는 "안보법은 일본이 외국에서 군사행동을 하겠다고 밝힌 것”이라며 ”이슬람 세계에서는 미군의 우군인 일본을 확실하게 적대시한다. 우리도 철수할 수밖에 없는 사태가 올지 모른다”고 우려했다. 이어 “아프간 동부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 과격파 조직 이슬람국가(IS)에 충성을 바치려는 젊은이가 늘고 있다”며 “기아에 허덕이는 주민들의 생활을 안정시키는 게 진짜 안전 보장”이라고 했다.
강행 처리에 참여한 연립여당 자민당·공명당과 차세대 당 등 3개 야당 의원들을 상대로 내년 7월 참의원 선거에서 낙선 운동을 벌여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안전보장 관련 법안에 반대하는 학자들의 모임’ 발기인인 우치다 다쓰루(?田樹)는 "찬성한 의원을 모두 떨어뜨리는 운동을 하겠다"고 말했다. 안보법안 반대 시위를 주도해온 대학생 단체 ‘실즈(SEALDs)’도 야당과의 연대 등을 통해 선거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도쿄=이정헌 특파원 jhleehop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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