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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연 회장의 특별한 채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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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조강수
조강수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조강수
사회부문 부장

그를 처음 본 건 1982년 3월 초 고등학교 입학식 때였다. 입학식이 열리는 교내 강당으로 이동하다가 갑자기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서 돌아보니 초로(初老)의 신사들이 한 젊은이를 호위하듯 에워싸고 강당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 젊은이는 29세에 대기업 총수가 된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었다. 학교 이사장 자격으로 입학식 축사를 하러 온 거였다. 초로의 신사들은 16개 계열사의 사장단이라고 했다. 아직도 그 광경이 뇌리에 또렷하다. 고교 졸업 후 대학에 입학하자 뜻밖의 선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국내 상위 5개 대학 중 한 곳에 들어가 B학점 이상을 받으면 매 학기 장학금을 주는 제도였다. 지급 주체는 고교 재단. 학점이 낮은 데로 임한 첫 학기를 빼고 졸업할 때까지 수업료 달라고 부모님께 손 안 벌려도 됐다. 보너스도 있었다. 대학 졸업 후 원하기만 하면 채용도 해준다는 것이었다. ‘통 큰 혜택’의 기저에는 본교 출신 학생은 끝까지 책임진다는 ‘의리’와 철석같이 믿는다는 ‘신용’이 깔려 있었다.

  이제 와서 33년 전 기억을 꺼내 반추해 본 건 5년 전 천안함 피격 사건 때 희생된 46용사의 유족들을 포옹하는 한화 측의 조치가 그때와 어딘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특히 ‘채용’이라는 단어가 그랬다. 천안함 피격 소식을 들은 김 회장은 “방위산업체를 경영하는 회사로서 단기적·물질적 지원보다는 항구적 일자리를 제공하라”고 지시했단다. 회사가 취업희망 여부를 문의했더니 38가족이 취업을 원했다. 한 가족당 1명 채용을 원칙으로 정했다. 첫해 4명을 필두로 3명(2011년), 3명(2013년), 1명(2014년), 올해 6명 등 17명이 채용됐다. 현재 ㈜한화 12명, 한화갤러리아 2명, 한화생명 2명, 한화저축은행 1명이 근무 중이다. 나머지 21가족은 자녀가 성인이 되면 채용한단다.

 사실 대학 졸업 후 먼발치에서 김 회장을 볼 기회가 적지 않았다. 주로 아름답지 않은 ‘형사사건’들과 관련해서다. 대선자금 제공, 보복 폭행, 배임 등의 사건 피의자로 조사를 받으러 나왔을 때다. 그때마다 80년대 초에 봤던 젊은이의 모습이 떠올라 혼자 씁쓸해하곤 했다.

 그 씁쓸함이 이번에 달콤쌉싸름함으로 진화한 건 한순간 큰돈을 지급하는 ‘성금’보다 일자리 약속이 더 값지다고 생각돼서다.

 마침 롯데그룹이 지난달 4일 북한의 목함지뢰 도발 사건 이후 전역을 자진 연기한 87명의 병사 중에서 12명을 최근 특채했다. SK그룹도 다음주 채용설명회를 연다고 한다.

  일제에 항거했던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 어렵사리 생계를 잇다가 외로이 숨졌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 아파했던 경험이 우리 모두에겐 있다. 대기업들이 나라를 위해 희생한 사람들이나 가족들에게 물고기가 아니라 일자리(물고기 잡는 법)를 찾아주는 게 관행이 될 순 없을까. 일자리에 목말라하는 청년 백수들도 반대하지 않을 것 같다. ‘정부’가 아니라 ‘나라’를 위해 희생한 분들에 대한 최소한의 보상은 시민의 ‘예의’다.

조강수 사회부문 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