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숙제 남긴 고객 중심 증권사 경영 실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04면

정선언
경제부문 기자

지난달 초 미국 실리콘밸리 출장에서 만난 구글·페이스북·트위터 같은 기업 관계자로부터 가장 많이 들은 말은 “고객에 집중하라”였다. 한 기업 최고경영자(CEO)인 A 대표에게 이 말을 전했더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 “고객이냐, ‘오너’라 불리는 창업자 일가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 미국 기업은 고객을 택하는데 한국은 오너를 택하더군요.” 미국에서 30년 넘게 일하다 2년 전 한국에 온 그는 “이해하기 어려운 문화”라고 했다.

 최근 불거진 주진형 한화투자증권 사장과 관련된 논란을 보며 그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주 사장은 지난주 그룹 측으로부터 “연임이 어려우니 CEO 승계를 위해 추가로 사내이사를 선임하겠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의 임기는 내년 3월까지다. 임기 한 두 달 남기고 진행되는 절차가 6개월이나 앞서 시작된 셈이다. 사실상 경질 통보라는 얘기가 나온다.

 업계 10위권에도 들지 않는 중소형사 사장의 거취가 주목받는 건 주 사장이 취임 이후 파격 행보를 이어오고 있어서다. 2013년 취임한 그는 ‘사라(매수)’만 있고 ‘팔라(매도)’는 보고서가 없는 업계를 비판하며 매도 보고서를 의무화했다. 기업 눈치 보느라 투자자에게 제대로 된 정보를 주지 못해선 안된다는 취지다. 영업직원이 주식 매매를 자주 하도록 권해 수수료 매출만 올리고 정작 고객은 손실을 입는 관행을 근절하겠다며 매매 회전율을 제한하기도 했다. 판매 수수료가 높으면 일단 파는 펀드 판매 관행도 바꾸겠다며 수익률 좋은 소수 펀드를 골라 파는 코어펀드제를 도입하기도 했다. 일각에선 “여의도 사정을 무시한다”는 비판도 있었다. “독불장군처럼 행동하니 연임이 어려울 것”이란 얘기가 적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의 실험 중심에 고객이 있다고 평가하는 증권인도 많다.

 논란에 기름을 부은 건 지난 6월과 7월 나온 두 건의 보고서다. 미국 헤지펀드 엘리엇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에 반대하고 나섰을 무렵이다. 한화증권 리서치센터는 “두 회사 합병이 무산될 가능성이 크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내놓았다. 합병 성사 의견이 지배적이었던 증권업계에선 이례적이었다. 복수의 업계 관계자는 “이게 문제가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그룹으로부터 방산기업을 인수한 한화그룹 입장에선 껄끄러울 수 있는 내용이서다. 한화증권 고위 관계자는 “지난 7월 당시 한화생명 부회장이던 김연배 고문이 주 사장을 찾아와 ‘그룹에서 불편해 했다’는 말을 전한 것으로 안다”며 “주 사장은 ‘리서치센터의 독립성이 훼손되면 증권업 자체가 흔들린다’고 항의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그룹 계열사 간 거래에 있어 편의를 봐달라’는 요청을 거절한 것도 갈등을 부추긴 요인 같다”고 귀띔했다.

 요즘 한화증권 직원은 어느 장단에 맞출지 갈피를 못잡는다. 그룹에선 CEO 교체를 시사했고, 사실상 시한부 사장은 임기까지 하려던 일을 계속하겠다는 입장이니 말이다. 한 직원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며 “그 피해는 결국 고객의 몫”이라고 말했다.

 “한국에 왜 퍼스트무버(first mover·개척자) 기업이 없냐고요? 고객이 중심이 아니어서죠. 어떻게 혁신할지에 대한 답은 고객이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A 대표의 말이다. “실리콘밸리 같이 세계적 기업이 나오는 생태계를 만들고 싶다면 그룹이 아니라 고객 눈치를 보는 문화부터 만들어야 한다”는 A 대표의 말을 곱씹어볼 일이다.

정선언 경제부문 기자 jung.sunean@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