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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선만(日鮮滿) 블록, 일만(日滿) 블록으로 대체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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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4호 20면

만주국의 건국이념을 선전하는 그림엽서. 일본족이 가운데 선 모습이 눈에 띤다. 일본족 오른쪽 조선족의 서열이 한족과 만주족보다 높은 지 여부는 만주국이 패망할 때까지 최대 쟁점이었다.

지난 8월 15일부터 남북한 사이에 30분의 시각차가 생겼다. 북한이 표준시를 동경 135도에서 127.5도로 조정했기 때문이다. 한반도라는 작은 땅덩어리에서 시간대마저 갈라진 현실은, 영토가 광활한 중국이 하나의 표준시(동경 120도)를 쓰는 것과 대비된다.


중국도 1949년 공산화되기 전에는 5개의 표준시를 썼다. 만주는 중화민국(장제스 정부), 일본, 러시아가 할거했던 탓에 3개의 표준시가 쓰였다. 만주 서부(동경 120도)에 비해 북쪽의 하얼빈(哈爾濱)과 동쪽 창바이(長白, 백두산) 지역은 각각 26분과 30분이 빨랐다.


이것은 열차 운송에서 골칫거리였다. 그래서 만주국 정부는, 1937년부터 표준시를 동경 135도 즉 도쿄 시각에 맞췄다. 1912년부터 도쿄에 시간을 맞춰왔던 조선총독부가 그 조치를 먼저 제안했지만, 제안을 하면서도 마음은 편치 않았다. 일본과 만주가 가까워질수록 조선의 입지가 줄기 때문이다.


일본에 조선은 보석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1931년 9월 만주사변 이후 일본의 관심은 조선에서 만주로 바뀌었다. 국제연맹이 조사단을 파견하고 일본을 압박하자 그 반발심이 만주열기로 표출된 것이다. 관동군을 위한 국민헌금운동과 위문활동, 그리고 입대지원이 줄을 이었다. 재조(在朝) 일본인들은 그것을 ‘광태(狂態)’라고 부르면서, 일본 언론에 대해서는 “조선을 다시 보라”고 촉구했다.

만주국에 도착한 리튼조사단. 국제연맹 조사단은 만주사변이 일본의 조작이며, 만주국은 중국에 환원돼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1932년 10월). 이에 불복한 일본은 1933년 3월 국제연맹을 탈퇴했다.

만주의 조선인, 3등 국민 취급국제 사회의 맹렬한 반대 속에 출범한 만주국은 바로 옆 조선총독부부터 불편하게 했다. 초대 총무처장관(행정부 수반) 고마이 도쿠조우(駒井德三)는 “조선통치는 실패였으며, 만주가 제2의 조선이 되어서는 안 된다”며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거기에 더해서 1934년 11월에는 부산에서 만주국 수도 신징(新京)까지 소위 ‘히카리(光)’라고 불리는 특급열차가 개통되어 한반도 주파시간이 4시간이나 단축되었다. 일본과 만주 간 물류이동이 빨라지는 것은 조선이 통과지로 전락하는 것을 의미했다. 고속철도(KTX)가 개통된 뒤 지방경제가 위축되는 것처럼 조선도 곧 그럴 처지였다.


만주국이 설립될 때 조선총독은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였다. 조선의 공업화에 상당한 공을 들였던 그는 ‘일선만(日鮮滿) 블록’의 아이디어를 구상했다. 장차 일본-조선-만주를 ‘정공업(精工業)-조공업(粗工業)-농업원료지대’로 특화한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어느 순간 ‘일만(日滿) 블록’으로 대체되었다. 만주가 조선의 자리를 밀어낸 것이다.


‘일만(日滿) 블록’을 추진하는 중심인물은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만주국 실업부차관이었다. 일본 상공성 출신인 기시는 닛산의 자본을 끌어다가 자본금 4억5000만 엔 규모의 만주중공업주식회사를 세웠다(1937년). 이어서 총투자규모 25억 엔의 만주국 산업개발 5개년계획도 입안했다. 당시 일본 국가예산(16억 엔)과 비교해 볼 때 상상을 초월하는 프로젝트였다. 탁월한 기획능력과 추진력을 갖춘 만40세의 기시는, 기회의 땅 만주에서 입신양명을 꿈꾸는 신진세력의 아이콘이 되었다(나중에 총리가 된 기시는 아베 신조 현 총리의 외조부다).


만주인맥의 부상은 조선인맥의 위축을 의미했다. 70세를 바라보는 우가키 조선총독부터 입지가 흔들렸다. 그가 조선공업화 계획을 세운 것은, 그것이 전임자들의 무단통치에 대한 대안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을 발전시켜 동화시키는 문치(文治)야말로 일본의 이익에 부합한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1922년 워싱턴 군축회의에 참가하여 군비축소방안에 합의한 경력 때문에 그는 육군의 강경파로부터 집중 견제를 받고 있었다. 그의 포부를 읽은 천황이 훗날 그를 총리로 지명했으나 통제파의 협박으로 취임을 포기해야 했을 정도다. 그러므로 그가 제안한 ‘일선만(日鮮滿) 블록’ 아이디어는 별로 환영받지 못했다.


우가키의 뒤를 이은 미나미 지로(南次?) 조선총독은 만주국 관동군사령관 출신이었다. 그래서 만주와 조선 중 어느 쪽도 우선할 수 없었다. 미나미는 자기 후임인 우에다 겐키치(植田謙吉) 관동군사령관을 만나 ‘선만일여(鮮滿一如)’라는 원칙을 세웠다(1936년 투먼회의). 만주 일대 표준시를 조선(동경 135도)과 일치시킨 것이 그 원칙의 하나였다.


하지만, ‘선만일여’는 이미 시작된 조선의 위축을 애써 감추려는 정치적 수사에 불과했다. 바야흐로 만주국 설립 이후의 조선은 청일전쟁 이후의 오키나와와 비슷해졌다. 일본의 설탕 공급지로 각광받았던 오키나와는 일본이 대만을 차지한 뒤 사탕수수 재배지로서 가치를 잃고 쇠락의 길을 걸었다. 중일전쟁 이후 ‘일만(日滿) 블록’은 중국까지 포함하는 ‘일만지(日滿支) 블록’으로 확장되고 당국자 회의에서 조선은 빠졌다. 이제 일본의 정책지도에서 조선은 사라지고, 지배의 대상으로서 ‘조센징’만 남았다.


그렇다. 결국은 사람이 문제였다. 만주국의 건국이념은 ‘오족협화(五族協和)’였는데, 이것은 일본족, 조선족, 한족, 만주족, 몽골족이 민족화합을 통해 지상낙원(王道樂土)을 이룬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것은 처음부터 달성하기가 불가능했다. 바로 조선족 때문이었다.


두만강 건너 간도 지방에서는 아주 오래전부터 빈 땅을 개간하여 살아온 조선인들의 토지 소유와 점유가 인정되었다(1909년 간도협약). 일본인들은 이점을 이용해 조선인을 앞세워 진출했고, 만주족은 조선족을 ‘얼구이즈(二鬼子)’ 즉 일본인 앞잡이로 불렸다. 조선족이 ‘얼구이즈’로 몰리지 않으려면 만주로 귀화하고 변발흑복(?髮黑服)을 해야 했으나, 대부분이 거부했다. 오히려 귀화하는 사람을 ‘얼되놈’ 즉 중국인 앞잡이라며 따돌림 했다. 이런 감정대립 속에서 조선총독부는 두 민족 사이를 돈으로 이간질했다. 조선 독립투사를 잡아오면 현상금을 주겠다고 유혹하여 안창호 선생이 만주인 손에 체포되기도 했다(1927년).


중국과 조선총독부의 밀월은 만주국 설립 후 깨졌다. 만주국 정부가 현지 조선인들에게 만주국적을 부여하려고 했으나 조선총독부가 반대했기 때문이다. “일본인과 조선인을 동일하게 취급하는 것이 천황의 명령”이라며 조선인도 법률상 ‘선계(鮮界) 일본인’임을 상기시킨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인까지 ‘1등 국민’의 반열에 놓이는데, 만주국은 이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결국 국적법은 제정되지 않았다. 주민만 있고 국민은 없는 이상한 나라가 만주국이었다.

일본 만주척식공사를 통해 만주국에 정착한 일본인들. 조선도 경쟁적으로 선만척식주식회사를 세우고 조선인들을 대거 송출했다. 현지 조선인들이 ‘조선인 민회’를 결성하고 강한 결속력을 과시하자 만주국은 이를 강제 해산하고 ‘만주국협화회’에 가입토록 했다.

평가하기 어려운 대한민국의 만주인맥조선총독부가 조선인의 신분보호에 특별히 관심을 둔 것은, 체제이탈을 인정하지 않는 일본의 국적법 때문이었다. 일본은 국가총동원 체제 유지를 위해 국적 선택이나 포기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조센징’은 어디에 있건 내선일체(內鮮一體)의 원칙이 적용되고 징병의 대상이 되었다. 안수길의 소설 『북간도』에는 중국인과 일본인 사이에 끼어 변발흑복과 창씨개명을 동시에 강요받는 ‘1등 국민’이자 ‘3등 국민’들의 애달픈 삶이 그려진다.


조선족의 또 다른 별명은 ‘가오리방즈(高麗棒子)’였다. ‘방즈’는 거지라는 뜻이다. 20세기 초 만주로 간 조선인들은 사실 거지꼴이었다. 몸뚱이 밖에 없던 여자들 중에는 성매매로 빠지는 경우도 많았다(다른 민족에 비해 매춘인구 비율이 높았다). 하지만, 성병 감염률이 낮다고 알려져서 몸값은 비쌌다. 동아일보 편집국장이던 춘원 이광수는 현지 조사를 마친 뒤 “중국인보다 청결한 조선여자들은 인육장사(성매매)에서도 환영을 받는다”며 기쁜 듯이 기록했다.


남자들도 비슷했다. 초기에는 거의 대부분 농사에 매달렸고, 일부는 중국인 밑에서 소작농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악착같은 생활력을 발휘해 곧 형편이 나아졌다. 부농 출신인 시인 윤동주 집안이 그렇다. 1930년대에 이르러서는, 상업과 운수업에서도 놀라운 약진을 보였다. 오늘날 동남아시아의 화교들처럼 재력을 바탕으로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는 경우도 있었다.


조선의 똑똑한 젊은이들은, 일본 주류사회에서 만주인맥의 부상과 만주동포들의 성공사례를 보고 만주행을 결심했다. 그들 중에는 의사, 변호사, 교사뿐만 아니라 행정관료(최규하, 강영훈)나 장교(박정희, 정일권, 백선엽)를 꿈꾸는 사람도 있었다. 비좁은 조선을 벗어나 광활한 만주를 향했다는 점에서 그들의 꿈은 호연지기였으나, 체제에 순응했다는 점에서는 지극히 소시민적이었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혈기왕성하게 족적을 남긴 그들이 소시민적이었다는 것은, 암울한 시대가 만든 역설이다. ‘선계 일본인’들이 1등 국민인 동시에 3등 국민이었던 것처럼.


‘선계 일본인’ 문제는 법률과 민족감정이 뒤얽힌 문제였다. 그래서 만주국과 조선총독부가 해결할 수 없었다. 이런 틈바구니에서 조선은행은 만주를 이용하기도 하고 이용당하기도 했다. 그것이 다음 이야기의 주제다.


차현진 한국은행 인재개발원장?hyeonjin.cha@bok.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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