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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창조의 순간이 이런 느낌이었을까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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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4호 27면

겸재 정선의 ‘문암관일출’(부분, 간송미술관).

요한나 마르치.

요한나 마르치의 LP음반은 불가근(不可近)이다. 특히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 초반은 구경하기도 힘들거니와 눈앞에 있어도 만져보기 힘들다. 지갑이 얇은 애호가는 가격을 확인하고 나면 그녀를 미워할지도 모른다. 마르치의 음반이 비싼 이유는 명반이기 때문이다. 명반이란 명곡을 명연주로 녹음한 데 더해 희귀한 것을 말한다.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이 명곡인 것은 새삼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러면 마르치의 연주가 명연주인가? 연주란 악보를 해석하는 일인데 이 심오한 예술행위는 연주자의 기량과 정신세계에 의해 좌우된다. 평자들은 마르치의 연주가 기품(氣品)이 있다고 말한다. 몇 장 남아 있는 그녀의 흑백사진이 전해주는 분위기는 단아하다.


바흐 무반주 연주에는 우뚝한 대가가 많다. 눌연(訥演)의 절기(絶技)라는 모순된 찬사를 받는 요제프 시게티, 고독이 서리처럼 엉긴 하이페츠, 명연주의 기준 헨릭 쉐링…. 그러나 기품 있다는 평가를 받은 이는 요한나 마르치뿐이다. 바흐의 건조한 악보를 다른 대가와 대비되는 뚜렷한 개성으로 해석했다면 명연주 아니고 무엇이랴.


그런 연주를 LP로 구하기 힘들다. 조기에 은퇴해 활동기간이 짧았기 때문이다. 당시로선 흔치 않던 여류 바이올리니스트로 뛰어난 예술성을 가진 마르치가 갑자기 은퇴한 사연에 대해서는 야담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EMI 프로듀서 발터 레게가 은밀한 제안을 했는데 그녀가 거부하고 고국 헝가리로 돌아갔다는 것.


세계 최대 음반사의 명PD였던 레게는 음악계의 절대 권력이었다. 카라얀도 2차 대전 후 레게가 거두어 주었을 때는 머리를 숙여야했다. 그런 실력자를 등졌다면 연주자로서의 삶은 끝났다고 봐야 한다. 바흐 무반주 등 EMI 스튜디오에 남겨진 그녀의 녹음들은 소량 발매된 뒤 서서히 잊혀졌다.


희미하지만 매혹적인 향기는 고요히 세상을 떠돌았고 마침내 숭배자를 낳았다. ‘마르치에 미친’ 조각가 글렌 암스트롱은 음반사 쿠다르셰를 설립하고 마르치의 옛 음반을 하나하나 재발매했다. EMI에 남아 있던 녹음 여덟 타이틀도 LP 박스반으로 출시했다. 바흐도 포함됐음은 물론이다.


나는 이 음반을 구입하지 않았다. 가격은 이제 엄두낼 만 했지만 음반 만듦새가 매력적이지 않았다. 경험상 박스반은 잘 듣지 않게 되고 내부의 낱장들도 원래의 고풍스런 재킷을 재현하지 않아 가치가 떨어져 보였다. 음반은 소리를 담는 그릇이지만 하나의 작품으로서 완결성이 있어야 한다. 나는 CD로 마르치를 해결했다. 박스반의 핵심인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과 슈베르트의 바이올린 소나타곡은 CD 2장씩이면 충분하다.


LP에 미련이 남아 있었는지 마르치의 바흐는 나를 감동시키지 못했다. 대신 지금까지 존재 자체를 모르던 슈베르트의 작품 하나가 귀를 붙들었다. 거의 30분에 달하는 대곡을 처음부터 끝까지 몰두해 들었다. ‘판타지 C장조, D.934’가 그것이다.


아무런 표제가 없지만 첫 음을 듣는 순간 ‘바다’가 떠올랐다. 들릴 듯 말 듯 작은 소리로 빠르게 두드리는 피아노는 수평선의 잔물결이다. 언제 시작했는지 모르게 고요히 떠오르는 바이올린은 수평선 아래서 얼굴을 내미는 해다. 천지가 새로이 생겨나는 순간처럼 곡의 시작은 신비하다. 이윽고 해는 높이 솟아오르고 바이올린은 비행운처럼 가느다란 흔적을 남기고 사라진다.


선율과 리듬이 돌변한다. 무대는 여전히 바다. 깨끗한 모래밭에 아이들이 깡충깡충 춤을 추며 줄지어 들어온다. 해변엔 그들 외엔 아무도 없다. 해는 높이 떠올랐고 대기는 투명하다. 아이들은 요정처럼 춤을 추다 서서히 사라진다. 이번에는 피아노가 여운을 남기며 허공으로 사라진다.


잠시의 정적, 텅 빈 공간에 피아노가 귀에 익은 곡을 홀로 연주한다. 저 곡이 뭐더라. 바이올린이 등장하자 머리가 반짝한다. 슈베르트 리트 D.741이다! 피셔 디스카우의 목소리로 듣던 ‘Sei mir gegrusst(내 인사를 받아주오)!’ 뤼케르트의 시에 곡을 붙인 작품이다. 친구가 선물로 준 음반에서 처음 듣고 매료됐다. 내가 ‘판타지 D.934’를 깊이 좋아하게 된 것은 이 리트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슈베르트는 오래 전에 지은 노래에서 선율만 가져왔겠지만 내 맘 속엔 시가 떠오른다.


‘그 언젠가 사랑이 피던 날에/입맞춤은 내 영혼 불같이 태워 버렸다오/내 인사와 입맞춤을 받아주오/거리와 공간 사랑엔 없으니/그대 언제나 내 곁에 있고/내 품안엔 그대를 안았다오/ 내 인사와 입맞춤을 받아주오.’


리트는 다채롭게 변주된다. 곡의 중심을 이루며 제목 그대로 환상적인 장면을 펼친다. 어느 순간 바이올린이 피치카토로 소리를 죽이면 피아노가 전면에 나선다. 여전히 무대는 바다. 이번에는 밤이다. 피아니스트 장 안토니에티의 타건은 어두운 밤하늘을 화려하게 수놓는다. 그의 손이 건반을 내달리면 하늘엔 별똥별이 긴 꼬리를 끌며 떨어지고 불꽃이 연이어 터진다. 음악적 쾌감이 절정에 이른다. 왜 판타지라는 제목을 붙였는지 알 수 있다.


다시 잔물결이 인다. 이젠 황혼이다. 바이올린이 지친 태양처럼 스러져간다. 그런데 곡은 행진곡풍으로 다시 살아난다. 나는 이 부분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고요히 끝내는 것이 자연스러운데 교향곡 마지막 악장 코다(coda, 화려한 종결)처럼 끌고 간다. 이 곡이 초연되었을 때 중간에 일어나 퇴장한 평론가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 부분에서 나와 같은 생각을 한 게 아닐까.


우연히 만나 깊이 빠져든 곡이라 여러 음반을 섭렵했다. 그런데 다른 연주에서는 바다가 떠오르지 않는다. 잔물결 이는 수평선도, 붉은 해도, 밤하늘의 불꽃도 보이지 않는다. 마르치와 안토니에티는 문득문득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잊게 하는 소리를 낸다. 슈베르트가 오선지에 음표를 써 넣을 때 그의 머리에 떠오른 것도 악기소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바닷가 풍경은 아니더라도, 또 다른 어떤 환상….


최정동 기자choijd@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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