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한부 아내 죽자 함께 떠나려한 70대 남편

중앙일보

입력

 
"암 환자 보호자입니다. 환자가 운명하시어 남편으로서 같이 갈까 합니다. 그리하니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마시고 장례 부탁합니다. 장례비용 현금 500만원을 남기니 부탁드립니다."

암 말기 시한부 판정을 받은 아내가 먼저 숨지자 남편은 이런 유서를 남겼다. 그러곤 농약을 마시고 자신도 목숨을 끊으려 했다.

지난 30일 오전 6시10분쯤 전북 장수군 산서면 오산리 영대산 등산로 입구 주차장에 세워진 캠핑카 침실에서 지모(73·여)씨가 반듯이 누워 숨져 있는 것을 사위와 경찰이 발견했다. 캠핑카 주변에 쓰러져 있던 남편 박모(74)씨는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고 있다.

전북 전주시에 사는 사위는 경찰에서 "장인에게서 먼저 연락이 왔다. 장소를 알려주시며 '뒷일을 부탁한다'는 말씀에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아 경찰에 신고한 뒤 현장에 함께 가봤다"고 말했다.

경찰 조사 결과 지씨는 지난 7월 말께 담낭암 말기로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 인천시에 살던 부부는 "한 달밖에 살 수 없을 것 같다"는 의료진의 말에 곧바로 중고 캠핑카를 구입한 뒤 여행을 떠났다. 곳곳을 여행하던 부부는 지난 21일 장수에 도착했다.

경찰은 남편 박씨의 진술을 토대로 아내 지씨가 30일 0시쯤 담낭암이 악화돼 숨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이후 남편 박씨도 아내를 따라 오전 5~6시쯤 농약을 마시고 목숨을 끊으려 한 것으로 보인다고 경찰은 전했다.

캠핑카 운전석쪽 서랍에서는 박씨가 남긴 유서가 발견됐다. 조용히 장례를 치러달라는 내용이 담겼다. 장례비로 쓸 현금 500만원도 캠핑카 침실쪽에 보관돼 있었다. 침실 벽면에는 부부의 영정 사진이 언제든 쓸 수 있게 걸려 있었다.

경찰 관계자는 "박씨 부부는 삶의 마지막을 함께하려 캠핑카로 여행을 다녔고, 남편 박씨는 아내가 먼저 숨질 경우 곧장 함께 세상을 떠나기 위해 준비해온 것 같다"며 "다행히 남편 박씨는 아직까진 생명에 지장이 없는 상태"라고 말했다.

장수=김호 기자 kim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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