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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주 화물기 40시간 동승기] 여객기보다 더 부드럽게 착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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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컴퓨터·반도체·무선통신기가 등이 작지만 비싼 제품이 한국의 수출 주력상품이 되면서 비행기가 주요 화물 운송 수단이 됐다. 특히 외환위기 직후인 1999년부터 항공화물이 급증하자 국내 항공사들은 세계일주 화물기 노선을 개발해 적지 않은 수익을 내고 있다. 본지 취재진이 지난달 11부터 15일까지 아시아나의 세계일주 화물기에 동승해 취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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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륙한 뒤 두 시간 정도 지나면 기류 변화가 심할 것으로 예보됐네요. 앵커리지까지 두 차례 정도 (기체가) 심하게 흔들릴 것 같습니다." 3월 11일 오후 1시(이후 시간은 모두 현지시간), 아시아나 OZ 588편 화물기를 조종할 서종식 기장 등은 운항브리핑 결과를 들려주며 짧은 한숨을 토했다.

서 기장은 "한두 번 수송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체가 흔들리면 전자제품에 나쁜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늘 걱정된다"고 말했다. 이날 화물기에는 30t에 달하는 휴대전화와 게임기.디지털 카메라.비디오 등이 실렸다. 화물 중에는 주한 미국대사관의 외교 행낭도 있었다. 여행용 알루미늄 가방에 어떤 문서가 들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를 들고 탄 외교관은 뉴욕에 도착할 때까지 굳은 표정으로 입을 닫고 있었다. 세계 어느 항공사든 외교행낭과 그 운반자는 우선 탑승시키도록 국제항공협약이 체결돼 있다. 특수화물로 분류해 일반 화물보다 수송료가 훨씬 비싸다는 게 아시아나 측의 설명이다. 다만 특이한 것은 수송을 맡은 외교관은 화물에 딸린 동승자로 취급돼 따로 돈을 내지 않는다. 오후 3시 108.7t의 화물을 싣고 인천공항을 이륙한 OZ 588기는 7시간여를 날아 앵커리지에 사뿐히 내렸다. "화물에 충격을 주지 않기 위해 여객기보다 더 부드럽게 착륙해야 한다"고 서 기장은 설명했다. 앵커리지에서 기름을 채운 비행기는 곧바로 뉴욕으로 향했다. 뉴욕 JFK공항에 화물기가 도착하자 아시아나 뉴욕화물지점 직원들의 눈이 바쁘게 돌아갔다. 한 직원은 "도난 사고가 간혹 있기 때문"이라면서 잠시도 화물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비행기는 뉴욕에서 화물을 내리자 곧바로 유럽행 화물을 가득 싣고 다시 브뤼셀로 떠났다. 뉴욕에 머무른 시간은 4시간에 불과했다.

그렇게 뉴욕을 떠난 비행기는 14일 오전 4시16분 다시 뉴욕공항에 모습을 나타냈다. 그 사이에 방콕과 싱가포르로 날아가 화물을 인천으로 나른 뒤 다시 뉴욕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 항공사 뉴욕화물지점 관계자들은 비행기가 도착하기 전날 오후 4시부터 바쁘게 움직였다. 화물을 어떻게 실을지 가상탑재 게임부터 했다. 무거운 것은 중앙으로 몰고 상대적으로 가벼운 것은 앞.뒤쪽에 배치하면서 중량을 맞추는 작업이다. 중량이 안 맞으면 이착륙할 때 심각한 상황을 초래할 수도 있다. 가상실험 결과 20여t의 화물은 다음 비행기로 보내기로 하고 탑재를 미뤄야 했다. 이날 실은 것 중 한국까지 수송되는 품목은 정밀기계 정도였다. 김광석 뉴욕화물지점장은 "요즘 세계일주 화물기가 수송하는 미국 제품은 반도체 제작에 쓰이는 정밀기계류나 농.수산물이 대부분"이라며 "그 중에 최종 목적지가 한국인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화물 가운데는 유엔 등이 아프리카로 보내는 의약품도 적지 않았다. 화물을 가득 채운 비행기는 같은 날 오전 7시31분 JFK공항을 출발해 6시간46분 만에 브뤼셀에 도착했다. 그곳에선 살아 있는 벌, 의약품, 명품, 의료장비, 정밀기계부품, 참치 등이 실렸다. 이근환 브뤼셀 화물지점장은 "참치와 명품 등은 대부분 일본으로 가는 것"이라며 일본인들의 소비성향을 설명했다.

우리나라 양봉업자나 농가에서 수분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수입하는 벌 400여㎏은 살아 있는 상태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특별대우를 받았다. 벌은 온도와 습도를 유지하고 진동을 줄이는 특수재료로 포장되며 숨구멍까지 별도로 뚫었다. 정성구 기장은 "살아있는 동식물을 옮길 때 신경이 많이 쓰인다"면서 "말이 놀라서 뒷발로 우리를 마구 찬다고 생각해 보라. 말을 운반할 때는 조련사가 함께 탑승하지만 터뷸런스(난기류)에 놀라기라도 하면 큰일"이라고 말했다. 구간에 따라 운송되는 화물의 종류는 철에 따라 바뀐다. 예컨대 브뤼셀에서 한국으로 오는 상품은 봄철엔 벌.참치 등이지만 가을에는 보졸레 누보, 겨울에는 아스파라거스가 포함된다. 가을에는 마카오에서 서울로 오는 화물엔 F-3 경주용 자동차들이 실린다.

15일 오후 4시48분 세계일주 화물기는 인천공항에 안착했다. 이 비행기는 닷새 동안 97시간34분의 비행을 통해 세계일주 노선을 두 차례 돌았다. 이 사이에 방콕.싱가포르를 경유하며 화물을 날랐다. 이번 비행에서 벌어들인 돈은 12억4000여만원에 달했다.

김기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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