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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외환위기 때 구조개혁의 빛과 그림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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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강봉균
전 재정경제부 장관

지금부터 17년 전인 1997년 12월 4일. 우리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210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받겠다는 협정을 체결하고 외환위기 수습에 나서게 된다.

 썰물처럼 빠져나가던 단기외채의 상환을 연기하고 새로운 외자가 들어올 수 있는 문호를 적극 개방함으로써 외화 유동성위기의 급한 불은 4개월여 만에 일단 끄게 된다. 여야 정권교체로 탄생한 김대중 정부는 외환위기의 1차적 책임이 있는 금융기관의 부실을 정리하기 위한 금융개혁과 금융부실의 원인제공자인 재벌 대기업들의 과잉부채 구조를 수술하기 위한 재벌개혁을 추진하게 된다. 정부는 100조원이 넘는 공적자금을 투입해 금융기관들의 부실채권을 정리해 주고 새로운 자본금을 수혈해 모든 은행을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 비율을 충족하는 클린뱅크로 탈바꿈시켰다. 이 과정에서 금융기관들은 통폐합 조치로 경영진 대부분이 물갈이되었고 직원들의 30% 이상이 직장을 떠나야 하는 엄청난 고통을 당하게 되었다.

 당시 정부는 이러한 고통이 다시는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는 소명감을 갖고 금융감독 기능을 통합해 예방적 건전성 관리기능을 강화토록 했다. 또한 금융기관 경영진 인사에 정부가 개입해 온 관행을 차단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도 나름대로 만들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도 금융기관들의 창의적 경영혁신을 뒷받침해 줄 만한 거버넌스 시스템은 정착되지 못하고 있다. 현 정부가 추진하는 금융개혁이 자율성을 제약하는 감독기능을 업그레이드하고 정부 인사 개입의 차단에 초점을 맞춰야 할 이유가 거기에 있다. 외환위기 때 재벌개혁은 단기적으로는 500%에 육박하는 부채비율을 국제기준인 200% 수준으로 낮추기 위한 사업 구조조정을 추진하면서, 중장기적으로는 기업지배구조를 개선해 경영의 투명성을 확보하고 재벌 총수들의 독단적 경영 방식이 전문경영 방식으로 바뀌도록 유도하는 것이었다.

 재벌의 재무구조 개선은 채권은행들이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서나 예금자 보호를 위해서나 강력히 추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재벌이 부채비율 200%를 달성하게 되었고 대마불사의 낡은 신화도 깨지게 되었다. 그룹 내 계열기업들끼리 얽히고설켜 있는 내부거래도 연결재무제표로 투명하게 만들고 상호출자는 금지되었다. 순환출자도 신규를 중단하고 기존 출자분은 점차 축소해 나가도록 했다. 사외이사제도와 외부감사제도도 도입해 대주주의 의사결정을 감시하고 견제토록 했다.

 그러나 최근 롯데그룹 사태를 보면서 아직도 총수가 경영권을 남용하거나 가족경영 형태를 탈피하지 못한 재벌기업들이 적지 않다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현 정부의 4대 개혁과제에 재벌개혁은 없지만 정부는 우리 경제의 글로벌 경쟁력을 좌우하는 재벌 대기업들에 대해 총수가 경영권을 독점하는 형태에서 벗어나 전문경영인들의 책임경영체제로 전환되도록 기업지배구조를 재점검해야 할 것이다.

 현 정부가 가장 역점을 두고 추진 중에 있는 노동개혁은 외환위기 당시에도 다른 모든 개혁의 성패를 좌우하는 열쇠였다. 금융기관과 대기업 구조개혁은 조직과 인력의 재편성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정리해고를 허용하는 노사정 합의가 초미의 관심사였던 것이다. 정부는 실업자 보호대책을 비롯한 사회안전망 확충을 약속하고, 기업은 경영상 불가피한 경우로 정리해고를 제한하는 조건으로 노사정 합의가 이뤄졌다. 당시의 대량실업 사태는 정리해고보다는 신용경색에 따른 중소기업의 도산과 경기 불황으로 인한 자영업의 폐업으로 발생해 저소득계층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었다. 정부는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최저소득계층 150만 명을 대상으로 기초생활보장제도를 도입했다. 임금피크제는 우리 노동시장 구조를 선진화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되는 개혁 과제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노동개혁은 노사 양측의 양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대기업들은 무슨 양보카드를 가지고 대기업 정규직 노조의 양보를 얻어낼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할 것이다.

 특히 재벌기업들은 외환위기 이후 늘어난 비정규직들에게 동일 노동, 동일 임금 원칙을 확대 적용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노동시장의 이중구조를 완화할 수 있다. 외환위기 때 정부는 공공개혁도 추진해 정부 규제도 축소하고 공기업 민영화도 추진했다. 그러나 아직도 공공부문의 비효율은 여전하고 권한 남용도 개선되지 않고 있다.

 외환위기 때 4대 개혁은 적어도 20년 앞을 내다보고 추진한다고 했지만 17년이 지난 지금, 빛은 바래고 그림자는 짙어지고 있다. 현 정부의 4대 개혁이 성공해 이 그림자들을 걷어내고 창조경제와 문화융성의 토대를 마련하기 바란다.

강봉균 전 재정경제부 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