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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허무해 임진왜란 일으켰다는 도요토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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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1호 28면

일러스트 강일구 ilgook@hanmail.net

적이 오기도 전에 짐을 싼다. 쉬지 않고 북으로, 북으로 도주한다. 심지어 국경을 넘어 요동으로 망명을 시도하기까지 한다. 말로야 사직을 지키기 위함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두려워서다. 파죽지세로 달려드는 적과 맞설 용기가 없어서다. 이 사람은 바로 선조대왕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적이 닥치기도 전에 ‘튀는’ 바람에 분개한 백성들에 의해 도성이 불태워지는 수모를 겪었다. 전쟁의 주범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조차 당황한다. “아니, 왕도 도망을 가나?” 왕에 대한 최소한의 고정관념이 무너지는 순간이다. 그래, 사람이니까 두렵기도 할 테지, 목숨은 누구한테나 소중한 법이니까. 이렇게 이해하려는 순간, 또 한번 ‘깨는’ 일이 벌어진다. 북으로 도주하면서 선조는 세자인 광해에게 조정을 맡긴다. 조정을 두 개로 나눈 것이다. 이름하여 분조(分朝). 한데, 이 아들이 의병들을 지휘하면서 왜적의 공세를 차단하자 당연히 민심이 그쪽으로 향한다.


그러자 이번에는 불타는 질투심에 휩싸인다. 끊임없이 아들의 진로를 방해하고 수시로 양위파동을 벌임으로써 아군의 전선에 막대한 차질을 빚는다. 이건 또 뭐지? 대동단결을 외쳐도 시원찮을 마당에 이 치졸한 파벌의식이라니. 더구나 광해는 자신의 아들이 아닌가. 한데, 또 그렇지가 않은가 보다. 대의는 대의고, 자신보다 더 백성의 신망을 얻는 건 용납할 수 없다. 그게 자신의 혈육이라 할지라도. 의병장 김덕령이 역적으로 몰려 희생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그러니 이순신 장군에 대한 심기야 말해 무엇하랴.


짐작하겠지만, 얼마 전 종영한 KBS 대하드라마 ‘징비록’의 주요 장면들이다. 오랜만에 참 좋은 사극을 만났다. 덕분에 본방을 사수하느라 ‘나의 시청률’ 1순위였던 개콘을 포기해야 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징비록’은 서애 유성룡이 남긴 임진왜란에 대한 기록이다. ‘피로 쓴 교훈’이라는 부제처럼 장면마다 긴장과 비탄이 서려 있다. 배우들의 연기도 일품이었다.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선조, 광기에 사로잡힌 도요토미, 절제된 카리스마의 이순신, 그리고 단호함과 격정을 두루 갖춘 주인공 유성룡까지. 기록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극적 긴장감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다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력 덕분이었다.


중원 질주 욕망에 사로잡힌 도요토미 때는 바야흐로 16세기 후반. 선조가 제위에 오르면서 조선은 비로소 ‘사림의 시대’가 열린다. 하지만 사림파의 집권은 곧바로 붕당을 야기했다. 동인과 서인, 남인과 북인 등으로. 전쟁의 기미를 파악하기 위해 왜국으로 사신단을 파견했지만 사신단의 견해는 확연히 갈렸다. 반드시 전쟁이 일어날 거라는 쪽과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쪽. 당색의 차이가 낳은 어처구니없는 결과였다. 양극단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던 차, 1592년(임진년) 마침내 전쟁이 발발했다. 도요토미가 패권을 잡으면서 150년간의 내전이 끝나자 그 여세를 몰아 조선을 침략한 것이다.


대체 왜? 도요토미는 말한다. 허무해서, 삶이 너무 허무해서라고. 그래서 조선을 짓밟고 중원땅을 호기롭게 질주하겠다는 욕망에 사로잡힌 것이다. 전쟁에 대한 통념도 산산이 부서지는 대목이다. 하긴, 그렇다. 우리는 전쟁에는 대단한 명분과 역사적 의미가 있을 거라고 간주하지만 과연 그럴까? 대체 어떤 명분, 어떤 의미가 그런 ‘피의 향연’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 차라리 도요토미의 말대로 ‘힘은 넘치는데 삶은 허무할’ 때, 그때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 아닐까?


조선에 구원병을 보내준 명나라의 처지는 또 어떤가? 임진왜란 이후 명의 신종황제는 구세주처럼 떠받들어지고 이후 북벌론과 소중화사상의 이념적 근거로 원용되곤 했다. 그러나 그 황제의 ‘꼴’은 한심하기 이를 데 없었다. 주색잡기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았고, 그러다 보니 중국 내의 반란을 진압하기도 벅찰 지경이었다. 겨우겨우 구원병을 꾸렸지만 명나라는 전쟁을 수행할 여력도, 의욕도 거의 없었다. 조명연합군 내의 갈등이 그치지 않았던 것도 그 때문이다. 그 와중에 명의 사신 심유경과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의 대사기극-조선과 일본, 명나라 조정을 다 속여먹은 강화문건을 작성한-이 벌어졌고 이 바람에 임진왜란은 몇 년 간의 소강상태를 맞이하다가 그 사기극이 들통나면서 정유재란이 발발했던 것이다. 참 놀라운 일이다. 제국 간의 전쟁도 이렇게 좌충우돌에 중구난방이라니. 과연 여기에 역사의 법칙이나 필연성 따위가 들어설 여지가 있기나 한 것일까.


우발성과 아이러니의 연속인 전쟁 전쟁의 구체적 과정을 들여다보면 더더욱 기가 막힌다. 그야말로 우발성에 아이러니의 연속이다. 전쟁은 제국과 제국 사이의 대격돌이다. 하지만 그것을 수행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별주체들이고, 이들의 욕망은 결코 제국적 표상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일단 왜장들부터 조선 침략은 물론이고 중국으로의 확전은 더더욱 원치 않았다. 명분 없는 전쟁에 동원되어 ‘개죽음’을 당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또 왜장들 역시 경쟁심과 질투가 하늘을 찔렀다. 특히 선발부대를 이끈 두 장군,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는 건건사사 대립했고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었다. 후반부에 가토는 고니시를 향해 이렇게 절규한다.


“조선군이나 명나라 군대보다 니 놈이 더 싫다. 너 같은 놈하고는 절대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


선조만 질투심에 눈이 먼 게 아니라 왜장들조차 그랬던 것이다. 이렇듯 주체들의 욕망이 분열적으로 흐르다 보니 전선 또한 수시로 요동쳤다. 일사분란한 진행 따위는 애시당초 불가능했다. 아, 그래서 문득 알게 되었다. 전쟁이란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는 것, 다만 인생의 연속일 뿐이라는 것을. 오히려 희노애락과 생로병사가 강도 높게 교차하는 인생의 ‘압축파일’이라는 것을.


가장 충격적인 사항은 ‘항왜’라는 존재였다. 항왜란 ‘항복한 왜’라는 뜻인데, 무려 만명이 넘는다고 한다. 전쟁 초반, 왜군이 승승장구하던 시절 가토의 선발부대 3000명이 조선에 투항을 한다. 이들은 이후 맹활약을 통해 왜적을 막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고 한다. 평소 조선의 고매한 문명을 선망하던 차 전란에 동원되었고, 해서 조선땅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결단을 내린 것이란다. 아무리 그렇기로 이게 말이 되나? 이런 식의 운명적 엇갈림을 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역사담론에선 이런 사항들을 취급하지 않는다. 아니,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이리라. 어쩌면 우리의 인식이라는 것이 전쟁의 원리와 리듬, 거기에 투여된 욕망과 행동을 파악하기에는 너무도 빈약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순신과 도요토미, 운명의 파트너였나 당혹스럽기는 왜군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은 당쟁으로 전쟁에 대비하지 못해 그렇다고 하지만 왜군들이야 군사적으로 압도적인 우위와 치밀한 전략을 갖추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의 전략과 예측은 번번이 어긋났다. ‘항왜’보다 더 그들을 곤혹스럽게 한 것이 두 가지 있었으니, 의병과 이순신이 그것이다. 의병은 일종의 게릴라다. 지형지물을 이용하고 사람들 사이를 이리저리 흐르는 존재들이다. 아무리 대규모의 병력이 있다 해도 이 미세하고 매끄러운 흐름을 차단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또 전쟁발발 전까지만 해도 이순신은 무명의 장수였다. 당연히 전술적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막상 전쟁이 시작되자 이순신은 단번에 주역이 되었다. 마치 임진왜란을 위해 세상에 온 것처럼 보일 정도다. 그는 승리의 화신이다. 왜? 지는 싸움은 애초부터 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유재란이 발발하고 1년쯤 뒤, 도요토미가 허무하게 병사하자 왜군은 무조건적 철군을 단행한다. 전쟁이 끝난 것이다. 하지만 이순신은 말한다.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고. 전쟁은 ‘내가 끝내야 끝나는 것’이라고. 드라마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사였다. 이렇게 도요토미가 죽고 이순신이 죽고, 그리고 임진왜란이 끝났다. 도요토미와 이순신, 그들은 과연 필생의 적이었을까? 아니면 운명적 파트너였을까?


총기간은 7년이었지만 실제 전투가 벌어진 건 임진년과 정유년, 두 해 정도였고, 나머지 기간은 서로 대치하는 소강상태였다. 5년이면 짧은 시간이 아니다. 그 사이에 숱한 삶의 변전이 일어난다. 초반에 그렇게 한심하고 비열해보이던 선조가 전란을 극복하기 위해 유성룡이 제시하는 각종 개혁정책-주로 사대부의 기득권을 내려놓는-에 동의하고 지지해준다.


또 전쟁의 와중에도 남인과 서인, 남인과 북인의 대립은 여전히 치열하다.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기 위해 광해는 북인들과 손을 잡고, 북인들의 대공세 속에서 남인에 속한 유성룡은 전란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다. 이후 정계복귀를 거부한 채 『징비록』 집필에 들어간다. 이렇게 대단원의 막이 내린다.


올해는 광복 70주년이다. 달리 말하면, 2차대전이 종결된 지 70년이 되었다는 뜻이다. 특히 우리가 겪은 것은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전쟁이다. 대체 일본은 왜 그토록 무모한 전쟁을 또! 일으킨 것일까? 아시아를 피로 물들게 하고 종국에는 자신들의 땅에 원폭을 불러들인 그런 야만적인 전쟁을. 해마다 이맘때면 사죄와 반성을 둘러싼 정치적 공방이 무성하지만, 과연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왜 그런 전쟁을 일으켰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을까? 혹시 그들 또한 도요토미처럼 삶이 허무했던 것은 아닐까? 허무가 광기를 낳고 그 광기가 죽음 충동을 향해 달려갈 때, 그때 전쟁에 대한 욕망이 싹튼다는 것. 『징비록』에서 건져올린 화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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