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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해서는 안 되는 것에 대한 깨달음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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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1호 14면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루디 삼촌’(1965), 캔버스 위에 유채, 87 x 50 cm

흐릿하지만 분명히 알 수 있다. 제복 청년이 환하게 웃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가 입고 있는 옷이 저 악명 높은 나치의 제복이라는 것도. 이 젊은이는 얼마 안 되어 전사했다.


독일 회화의 거장 게르하르트 리히터(83)가 이 작품을 발표한 것이 1965년. 유대인 학살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1급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이 도피 생활 15년 만에 체포·처형되고(1962),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이에 대해 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1963)에서 ‘악의 평범성’을 주장해 논란을 일으키던 시점이었다. 그림은 시대의 예민한 문제를 건드리고 있다. 그림 속 주인공은 리히터의 외삼촌인 루돌프 쇤펠더다. 한나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이라는 용어로 적절하게 지적했듯, 극악무도한 살상을 저질렀던 나치스트들은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저렇게 해맑게 웃는 보통 사람들이 나치의 살상에 아무 죄의식 없이 가담했다. 리히터는 ‘이모 마리안네’도 그렸다. 마찬가지로 물감이 채 마르지 않은 상태에서 마른 붓질을 해서 고의적으로 흐릿하게 그린 그림이다. 그림 속에는 단발머리 소녀가 활짝 웃고 있는데, 그 품에 안겨있는 것은 생후 4개월 된 어린 조카 리히터였다. 정신 질환을 앓고 있던 마리안네는 정신과 연구소에 보내져 강제 불임수술을 받고 그곳에서 죽는다. 나치의 정신병자들 실험의 일부였다. 정신병자 안락사와 불임시술을 담당했던 의사 중 한 명인 하인리히 오이핑거는 리히터의 첫 아내의 아버지였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모두 한 가족이었다.


리히터가 13살이 되던 해 전쟁은 끝났고, 그의 소년시절은 전쟁 잔해를 치우면서 흘러갔다. 패전국 독일을 만든 것은 아버지, 삼촌들이었다. 그들은 나치의 악행을 방조하거나 동조했던 많은 ‘작은 나치’들이었고, 여전히 살아있었다. 리히터의 그림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이들은 누구인가. 살가운 피붙이들이자 동시에 살인방조자, 동조자들인 이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


화끈하게 비판하고 돌아서서 쿨하게 잊어버리는 일은 독일식 방법도 아니었다. 피붙이인 전범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는 독일의 철저한 역사적 반성과 궤를 같이하는 문제다. 법률학자 출신 소설가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소설 『책 읽어주는 남자』(1993)는 이에 대한 진지한 답을 모색한다.


‘작은 나치’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1965년, 소설의 주인공 미하엘은 첫사랑과 재회한다. 열다섯 살 소년 시절 그는 서른여섯의 한나와 사랑에 빠졌다. ‘책 읽어주기, 샤워, 사랑 행위 그리고 나서 잠시 같이 누워있기’, 이것이 비밀스러운 만남의 의식이었다. 아슬아슬한 사랑은 그녀가 떠나버리면서 불현듯 끝났다. 상실감, 굴욕감, 죄책감과 그리움이 뒤엉킨 복잡한 감정을 가진 채 소년은 성장을 해서 법대생이 되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의미를 이해하고 용서하는 과정이 삶의 전부가 되었다.


첫사랑의 그녀를 다시 만난 곳은 예기치 못했던 장소, 전범재판소였다. 1922년 생인 그녀는 스물한 살에 전범기업인 지멘스에서 일했으며, 후에 나치 친위대에 들어가 아우슈비츠와 크라카우 근교의 작은 수용소에서 감시원으로 근무했던 ‘작은 나치’였다. 전쟁이 끝난 후엔 과거를 숨기며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살았다. 그들의 사랑도 그런 정처 없는 흘러감 속에서 이루어진 짧은 만남이었다.


한나를 포함해 법정에 선 ‘작은 나치’들은 아이히만처럼 “다만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한나 아렌트의 설명대로, 비인간적인 구조 속에서는 평범한 사람들도 죄의식 없이 악행에 동참했고, 스스로 생각할 기회를 포기했다. 그것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 현재 법정에서 벌어지는 사건이기도 했다. 다른 피고인들은 악의적으로 한나를 주모자로 몰아갔고,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했다. 재판에 참여한 사람 모두 일종의 ‘마비증세’ 같은 것을 보였다.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것이 일상화될 때, 사람들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무감각 상태에 빠졌다.


오직 한나만이 18년형이라는 중형을 선고받는다. 그러나 그녀는 항소하지 않고 수감생활을 시작한다. 미하엘만은 그녀가 책임자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한나가 통솔자라는 결정적 증거는 그녀가 보고서를 작성했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한나는 보고서를 작성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문맹이 그녀의 진짜 비밀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 사소한 비밀이 드러날까봐 보고서 작성이 본인의 일이었음을 시인했다. 기소장도 제대로 읽지 못해 적절하게 방어도 하지 못했다. 사랑에 빠진 소년에게 끝없이 책을 읽어달라고 부탁했던 것도 그녀가 글을 몰랐기 때문이다. 작은 잘못을 정정하지 못해서 그녀는 큰 잘못을 범하게 된 것이다.


미하엘은 한나를 잊을 수가 없었다. 다른 여자와 결혼도 했지만 이혼하고 만다. 그는 한나를 사랑했다. 그런데 한나는 범죄자였다. 사랑과 범죄자에 대한 유죄 판결은 양립할 수 없는 것처럼 여겨졌다.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을 사랑했기 때문에 자신도 유죄라고 느꼈다. 그는 한나에 대한 사랑 때문에 겪은 고통이 “자기 세대의 운명이고 독일의 운명”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리히터와 마찬가지로 소설의 주인공 미하엘은 전쟁에 직접적인 책임이 없는 세대였다. 직접적인 가담자거나 방조자였던 부모세대들에 대해 ‘수치’라는 판결을 내렸다. ‘수치심’은 단순히 타인을 향한 감정이 아니다. 그런 존재와 연관된 자신을 향하는 감정이기도 하다. 수치심은 부모세대가 행한 일에 대한 ‘연대책임’을 느끼는 것이었고, 문제를 바로잡는 것은 젊은 세대의 과제가 되었다.

영화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과거에 대한 단죄는 미래를 위한 일 그녀가 수감된 18년이란 세월은 그 과제를 풀어가는 시간이었다. 그는 여전히 문맹인 한나를 위해서 책을 읽고 녹음한 카세트테이프를 보내주었고, 감옥에 있는 동안 한나는 글을 배웠다.


작가는 “문맹은 미성년 상태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글을 배우고 나서야 한나는 비로소 미성년의 상태에서 벗어난다. 읽는 법을 배운 뒤 한나는 강제수용소에 대한 여러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그녀의 나머지 삶은 오로지 자신의 과거를 이해하는데 바쳐졌다. 그리고 그녀는 재판 중에도 깨닫지 못한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다. 명령을 수행하기 이전에 인간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생각해야 했다.


한나의 마지막은 오이디푸스적이었다. 출소 전날 그녀는 자살한다. 그녀는 형기를 마침으로써 공식적으로는 죗값을 치렀다. 그러나 오이디푸스가 패륜을 저지른 스스로를 단죄하듯, 한나는 사회 복귀를 포기함으로써 자신의 시대를 인간적으로 단절시켰다. 미하엘은 그녀에 관한 글을 쓰면서 마침내 용서에 이른다. 그에게 그 시간은 사랑과 유죄판결이 모순적이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시간이었다. ‘작은 나치’들의 찬동과 방조 속에서 히틀러는 세계사적인 악마로 자라났다. ‘작은 나치’들은 그들의 주장처럼 단순히 명령에만 따른 수동적인 존재들이 아니다. 결국 그들은 스스로 인간적, 도덕적 판단을 내리는 것을 포기함으로써 악을 구조화시키는데 일조했다.


작은 부분까지 철저히 반성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다시 반복될 수 있다. 과거 세대에 대한 철저한 단죄는 과거에 관한 일이 아니라 미래와 관련된 일임을, 그리고 그 대상에 대한 올바른 사랑임을, 둘 다 인간적인 삶을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보여주면서 소설은 끝이 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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