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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스님들 과수원 일궈 돈 마련 … 불상·쪽박에 숨겨 임정 전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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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경남 함양군 백전면 백운산 옛 화과원 자리에 복원된 ‘봉유대(鳳遊臺)’ 전경. 용성 선사는 1927년 화과원을 세운 뒤 이 선방에서 생활했다. [송봉근 기자]

경남 함양군 백전면 백운산(해발 1278m) 8부 능선인 해발 1000m 지점엔 배나무와 밤나무가 우거져 있다. 산에 많은 밤나무는 몰라도 배나무는 의외다. 여기엔 역사가 서려 있다. 이곳에선 일제 강점기에 한 스님이 과수원을 일궈 독립운동 자금을 댔다.

 주인공은 백용성(白龍城·1864~1940) 선사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다. 그는 1927년 이곳에 ‘화과원(華果院)’을 세웠다. 스님들이 참선하는 선방(禪房)을 짓고 과수원을 일궜다. ‘화과원’은 용성 선사가 존경한 중국 육조혜능대사(638~713)가 한때 머물렀던 중국의 산골짜기 이름이다.

 선방은 16개였고, 148만7600㎡ 규모의 과수원에서는 감나무·배나무·밤나무 1만여 그루를 가꿨다. 과수원은 용성 선사의 제자 스님 37명이 일궜다. 용성 선사는 제자들에게 “신도들의 봉양에만 의지하면 순수한 의미의 수도가 불가능하다. 그러니 승려도 일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 가르침에 따라 스님들은 낮엔 과수원을 돌보고 밤에는 참선하는 ‘선농일치(禪農一致)’의 수도생활을 이어갔다. 가마에서 그릇을 구워 내다 팔기도 했다.

 사실 ‘선농일치’는 일종의 눈가림이었다. 애초부터 용성 선사는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할 목적으로 과수원을 운영했다. 혹시 모를 일제의 방해공작을 피하기 위해 제자들에게까지 이런 사실을 철저히 숨겼던 것이다.

백용성 선사 사진(왼쪽)과 1945년 12월 12일 서울 종로구 대각사에서 열린 독립유공자 봉영회 만찬 모습. 백범 김구 선생 등 임시정부 요인 30여 명이 용성 선사의 뜻을 기리기 위해 모였다. 김구 선생은 이날 만찬에서 용성 선사의 독립운동 자금 지원 사실을 처음 공개했다. [사진 화과원·대한불교조계종 대각회]

 당시 화과원에서 생활했던 용성 선사의 최측근 표회암 선사(탄생연도 불명~1981)는 나중에 자신의 제자들에게 “시간이 흐르면서 스님들 사이에 스승님을 의심하는 마음이 생기기도 했다”고 전했다. 과일 팔아 버는 막대한 돈이 온데간데 없어서였다. 돈은 대체로 용성 선사가 갖고 나가 국내 또는 중국에서 독립운동가들에게 전했다. 용성 선사가 자주 중국을 오가자 일부 스님은 “중국에 살림 차리고 돈을 쓰는 것 아니냐”고 오해도 했다고 한다.

 용성 선사는 주로 거지로 위장해 역시 거지로 변장한 독립운동가를 만났다. 돈은 구걸할 때 쓰는 바가지 아래쪽에 넣고 그 위를 식은 밥으로 덮었다. 용성 선사가 “옴마니반메훔”이라고 진언(眞言)을 외면 상대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고 답하는 식으로 암호를 주고받았다. 이렇게 신원을 확인한 뒤에는 바가지를 바꿔 자금을 전달했다. 화과원에서 벌어들인 돈을 불상 안에 넣어 상해 임시정부에 전하기도 했다.

 일제의 감시를 피하려 “선농일치를 위해 과수원을 꾸린다”고 제자들까지 속였지만 일제가 아예 의심을 푼 것은 아니었다. 주로 서울에서 활동하던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 갑자기 산골에 둥지를 틀었기 때문이다. 때론 일본 경찰이 갑자기 새벽에 화과원에 들어와 이곳저곳을 뒤지고 용성 선사가 적어놓은 기록들을 검열하기도 했다. 하지만 용의주도한 용성 선사는 일본 경찰에 꼬리를 밟히지 않았다.

 이런 비밀은 광복 직후에 일부가 드러났다. 45년 12월 12일 백범 김구 선생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 30여 명이 5년 전 입적한 용성 선사를 모신 서울 종로구 대각사를 방문하면서였다. 김구 선생은 그날 밤 봉영회 만찬 자리에서 “선사께서 독립자금을 보내주지 않았던들 임시정부를 운영하지 못할 뻔했다. 이 뿐만 아니라 만주에 대각사와 선농당을 지어 독립운동하는 분들을 사찰에 숨겨주고, 그 가족들이 농사 짓고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준 공로는 독립운동사에서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때부터 용성 선사의 활동이 일부 알려졌고, 측근인 표회암 선사와 동헌 스님, 현 화과원장인 혜원 스님 등을 통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미스터리 하나는 용성 선사가 화과원을 지을 돈을 어떻게 마련했느냐다. 이와 관련해서는 “왕실이 돈을 보냈다”는 설이 있다. 동국대 총장인 한보광(65) 정토사 주지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선사께서는 1911년 서울 종로구 대각사를 창건했다. 대각사에는 왕실에서 나온 상궁 서너 분이 돌아가실 때까지 머물렀다. 이분들을 통해 선사께 왕실 자금이 흘러들어갔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수리할 때도 왕실에서 이분 상궁들을 통해 선사께 자금을 전했다는 기록이 있다.”

 독립운동의 역사가 서린 화과원은 지금 숲으로 변했다. 선방은 거의 모두 사라졌다. ‘봉류대’란 이름의 132㎡ 크기 선방 하나만 복원했고, 그 옆에 조립식 패널 숙소(52.8㎡)와 화장실 건물(13.2㎡)이 현재 있는 전부다. 2000년 8월 경남도 기념물로 지정됐지만 거의 폐허와 같다. 화과원장 혜원 스님은 “독립운동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화과원이 한국전쟁 후 공비토벌 과정에서 불탄 뒤 지금까지 이렇게 방치돼 있다”고 말했다.

 올 5월 들어서야 진종삼 전 경남도의회 의장과 이성애 도의원 등이 중심이 돼 ‘화과원 국가사적 지정 추진위원회’를 꾸려 복원 운동을 하고 있다. 진종삼 추진위원장은 “올해가 광복 70주년인데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던 곳이 폐허처럼 버려져 있다는 것은 후손들로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며 “하루빨리 국가 사적지로 지정해 용성 선사의 독립운동 정신을 이어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함양=위성욱 기자 we@joongang.co.kr
사진=송봉근 기자

[S BOX] 만해에 비견되는 선각자

백용성 선사는 만해 한용운(韓龍雲·1879~1944)과 함께 한국 근대불교의 새벽을 연 선각자로 꼽힌다. 1864년 5월 8일 전북 장수군 번암면에서 태어났다. 9세 때 한시를 지어 신동으로 불렸고, 16세에 출가해 해인사·보광사·송광사 등에서 정진했다.

 경술국치 이듬해인 1911년 서울 종로3가에 대각사를 창건했다. 대각(大覺)은 ‘나 스스로 깨닫고 남도 깨닫게 한다’는 뜻이다. 선사는 생전에 제자들에게 “어떤 사람은 독립운동을 하고 어떤 사람은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을 고발하는 일본의 첩자 노릇을 하는 현재의 상황에서는 진정한 독립을 할 수 없다.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이 깨달아 모든 민중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 진정한 독립을 이룰 수 있다”고 대각사를 세운 뜻을 설명했다. 그의 정신은 성철(1912~93) 스님 등 수많은 제자에게 이어졌다. 선사는 불경의 한글화에도 힘썼다. 90년 한글날에 은관문화훈장을 받은 이유다.

 선사는 40년 2월 24일 목욕재계를 한 뒤 제자들을 불러 “그동안 수고했다. 나는 간다”는 말을 남기고 입적했다. 22년 뒤인 62년 독립에 이바지한 공로로 건국공로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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