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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 같은 위안소, 나를 견디게 한 건 팔목의 점 3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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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공점엽 할머니가 왼쪽 팔에 새겨 넣은 문신을 바라보고 있다. 위안소에서 만난 ‘세 언니’와 서로를 잊지 말자며 새긴 징표다.

중앙일보가 창간 50주년, 광복 70주년을 맞아 위안부 피해 할머니 13인의 릴레이 인터뷰를 연재합니다. 사실상 생애 마지막 인터뷰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할머니들의 육성을 꼼꼼히 기록했습니다. 할머니들은 자기 생의 끝자락을 버티게 하는 소중한 대상을 하나씩 소개했습니다. 문신, 곶감, 대통령 표창 등입니다. 인터뷰 영상은 온라인 중앙일보(https://www.joongang.co.kr)와 아래 QR코드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이고 참말로 나, 원없이 고생했어. 살아난 거 생각허믄 아조 꿈도 같고. 하루에 처음 손님을, 한 번도 자도 못한 사람이 일곱이나 받았당께….” 지난 5일 전남 해남의 한 요양병원에서 만난 공점엽(95) 할머니는 30도가 넘는 날씨에도 긴팔 환자복을 입고 있었다. 뇌졸중으로 마비가 오기 시작한 왼쪽 손과 발은 한여름에도 차가웠다. 위안부로 끌려갔을 당시 위안소에서 다쳐 생긴 목 뒤 작은 혹은 주먹만큼 커져 누워 있기도 불편해 보였다.

 할머니는 겨우겨우 말을 이었다. 쥐어짜듯 온몸으로 힘을 줘야만 그날의 일을 얘기할 수 있어서다. 공 할머니는 1935년 15세의 나이로 고향인 전남 무안을 떠났다. 비단공장에 취직시켜 준다는 말을 믿고 3명의 일본인 남자를 따라나섰지만 도착한 곳은 중국 하이청(海城)의 위안소였다. 도착한 첫날, 평생 외간 남자 손 한 번 잡아 본 적이 없던 공 할머니는 7명의 군인을 상대해야 했다. 낯선 중국 땅에서 소녀는 매일 밤을 눈물로 보냈다. “일요일이 닥치믄 군인들이 수십 명씩 들어와. 나래비로 서서 신도 못 벗고 들어와서 자고 나가고….”

문신을 확대한 모습. 왼쪽부터 순천 언니, 광주 언니, 전주 언니를 상징한다.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던 할머니는 “힘들 때 어떻게 이겨 냈느냐”는 물음에 환자복 왼팔을 걷어 올렸다. 가느다란 팔목에 3개의 점(點)이 보였다. 지옥 같은 위안소에서 할머니를 처음 웃게 해 준 언니 3명과 함께 새긴 문신이라고 했다. 각각 순천과 광주, 전주에서 끌려온 언니들은 공 할머니를 친동생처럼 보살펴 줬다. “이건 순천 언니, 이건 광주 언니, 그라고 이건 전주 언니….” 3개의 점을 손가락으로 하나씩 가리키는 할머니 눈에 눈물이 맺혔다.

 38년 위안소 생활은 점점 지옥으로 변해 갔다. 받아도 받아도 끝없이 밀려들어 오는 남자들, 위안소로 딸을 보내는 줄 알면서도 허락한 아버지에 대한 원망, 의지하던 언니들과 헤어져 또 다른 곳으로 팔려 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뒤섞였다. 고향에서 겪어 보지 못한 지독한 추위도 견디기 힘들었다. 공 할머니는 “강물이 꽁꽁 얼 정도로 추울 적엔 언니들이랑 한방에서 껴안고 울고, 고향 이야기도 하며 버텼제”라고 말했다.

 서로를 의지하던 4명의 소녀는 늦은 밤 촛불 앞에 둘러앉았다. 바늘에 먹물을 묻혀 서로의 팔에 동그란 점을 하나씩 새겼다. “언제 어디로 끌려갈지 모릉게, 기억할라꼬 했제. 요즘에도 잠이 들믄 언니들이 나와 ‘아야 보고 싶었다. 보고 싶었다’ 하며 내 손을 잡아준당께. 참 정다운 사람들이었지… 죽도록 보고 싶어.”

 공 할머니는 문신을 새긴 뒤 오래지 않아 하얼빈(哈爾濱)의 위안소로 끌려왔다. “내가 잔뜩 죽것드라고, 오죽했으면 쥐약을 먹어 봤을 것이여.” 그곳에서 공 할머니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쥐약을 먹었다. 정신을 잃고 팔다리가 차가워진 채로 쓰러진 할머니를 보고 의사는 사망 진단을 내렸다. 관 속에 눕혀진 채로 이송을 기다리던 공 할머니는 뚜껑이 닫히기 직전 기적적으로 정신을 차렸다. “그렇게 죽다 살아났는데 정신 차리고 돌아오니 다시 영업을 시키더라고….” 관 속에서 걸어 나온 그날도 할머니는 일본군을 받아야만 했다.

 45년 해방이 되고 할머니의 위안부 생활도 끝이 났다. 해남으로 향하는 귀국길에 보성 출신의 남자를 만났다. 할머니의 ‘첫사랑’이었다. 남자는 귀국 행렬 속에서 그녀를 놓치지 않으려 노끈으로 서로의 몸을 묶고 다녔다. 그렇게 한국으로 돌아와 살림을 차렸지만 둘 사이에 아이가 태어나지 않았다. 공 할머니의 몸이 위안부 생활로 망가진 탓이었다. 미안한 마음에 공 할머니는 결국 이별을 결심했다. 이후 28세 되던 해 공 할머니는 중매를 통해 열일곱 살 많은 남자와 결혼했다. 할머니는 “평생 농사일만 해 온 남자”라고 했다. 결혼생활 6년이 지나자 남편과의 사이에서 아들 하나가 태어났다. 얼마 후 남편은 지병으로 세상을 떴다.

 남편이 죽고 공 할머니는 ‘당골’(무당)이 됐다. 한 맺힌 사람들이 할머니를 찾아왔고, 할머니는 그들을 위해 한풀이 굿을 한바탕 풀어냈다. 다른 사람의 한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에 끼어 있는 지독한 한도 함께 풀어내려는 씻김굿이었다. “나는 당골이여. 귀신 들린 게 아니고 굿만 허로 댕기는 당골이여.”

 할머니는 올해 2월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시민단체 ‘해남나비’ 봉사자들이 매주 할머니를 찾아가면 휠체어를 타고 병원 앞뜰로 나오는 게 외출의 전부다. 인터뷰를 마친 기자의 손을 잡고 할머니는 말했다. “우리 세 언니… 아니 언니의 손주라도 좋으니께 나 가기 전에 꼭 한 번 만나 보고 싶어.” 할머니에게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

◆특별취재팀=정강현(팀장)·유성운·채윤경·한영익·윤정민·김선미·김민관 기자,
사진·영상 정혁준 기자, 김상호 VJ. fone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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