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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한국식 오너경영이 뿌리내리게 하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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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기
김광기 기자 중앙일보 에디터
김광기
중앙일보시사미디어 본부장

재벌개혁은 참 풀기 힘든 숙제다. 외환위기 이후 벌써 17년째 그 타령이지만 달라진 건 없다. 또 한 명의 재벌 총수가 국민 앞에 고개 숙이며 투명경영과 지배구조 개선을 약속했다. 하지만 믿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재벌개혁이 잘 안 되는 것은 기본적으로 권력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정치권력은 5년 단위로 뒤집히지만, 경제권력은 임기가 없다. 누가 그 좋은 권력을 스스로 내려놓거나 나눠가지려 하겠는가.

 외국에서 공부한 3~4세 오너로 내려가면 좀 달라지려나 하는 것도 순진한 생각이다. 그나마 선대 창업자들은 그들이 직접 쌓은 권력의 속성을 잘 알기에 오히려 양보하거나 거래할 줄 알았다. 하지만 고생 없이 통째로 승계 받는 후대는 권력 그 자체를 천부적인 것으로 알고 그저 누리려는 경향을 보이기 쉽다.

 기자로서 재벌 오너들의 세대별 행태를 흥미롭게 관찰한 적이 있다. 우리 사회 유력 인사들의 상가 조문 현장에서다. 재벌 오너들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먼저 창업 1세대는 거의 혼자 모습을 드러낸다.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면서도 그런 분이 많다. 2세 오너들을 보면 대개 2~3명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나타난다. 3~4세로 넘어가면 어떨까. 놀랍게도 5명 이상, 많게는 10명 가까운 사람을 몰고 오는 분들이 등장한다. 혼자 오는 젊은 오너도 물론 있다. 대부분 승계 교육을 잘 받고 경영 성과도 출중하다고 평가받는 이들이다.

 오너의 황제경영이 걱정스러운 것은 견제 없는 의사결정의 위험성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제껏 용인됐던 것은 1~2세 오너들이 큰 성과로 경제성장에 기여하며 신뢰를 쌓은 덕분이었다. 아직은 힘을 몰아줄 필요가 있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엄존했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더 이상은 안 되겠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꼭 눈앞의 롯데 사태 때문만은 아니다. 재벌이 한국 경제를 먹여살리는 시대가 저물고 있다. 대형 조립·장치 산업의 경쟁력이 기울면서 고용 창출이 보잘것없다. 상당수 재벌은 글로벌 기업으로 거듭나려 노력하기보다는 국내 중소기업 영역을 넘보고 납품업체들에 횡포를 부리기 일쑤다. 더구나 다음 세대로의 경영권 승계가 머지않아 줄을 잇게 돼 있다. 그들의 능력은 검증된 게 별로 없다.

 재벌을 위해서도 이제 적절한 내부 감시 및 견제 장치가 필요하다. 오너경영을 끝내라는 게 아니다. 총수 1인에 집중된 권력을 적절히 나눠 효율적인 지배구조를 만들도록 하자는 얘기다. 황제경영을 대체할 입헌군주제식 경영이 그것이다. 오너 일가는 이사회를 이끌며 그룹의 비전 제시, 신사업 투자, 사회공헌 활동 등에 집중하고 일상 경영은 전문경영인들에게 일임한다. 아울러 외부의 일반 주주와 이해관계자들의 견해도 경영에 반영한다. 이는 스웨덴의 발렌베리 등 유럽 재벌들의 경영 스타일로, 100년 넘게 이어져 오는 가족기업의 장수 비결이다.

 이런 기업 통치시스템을 정착시키기 위해선 결단이 필요하다. 대다수 일반 주주들의 입장을 제대로 대변할 독립적 사외이사가 이사회 멤버가 되도록 길을 열어주는 일이다. 기존의 꿀 먹은 거수기 사외이사들 틈바구니에서 할 소리 하는 사람이 단 한 명만 있어도 허튼 의사결정은 줄어들 것이다.

 이게 되려면 국민연금이 힘을 보태 의결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점이 논란거리다. 연금사회주의와 정치권 낙하산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드센 이유다. 하지만 언제까지 구더기 무서워 장을 못 담그겠는가. 우려를 잠재울 방법은 있다. 국민연금과 다른 기관투자가들을 묶는 주주협의체를 만들어 사외이사 후보를 공동 추천토록 하는 방안이다. 국민연금의 오판을 다른 주주들이 견제하도록 하는 장치다. 아울러 기업의 전직 최고경영자(CEO)들을 중심으로 사전에 검증된 사외이사 추천 풀을 만들어놓으면 낙하산의 진입을 원천 봉쇄할 수 있다. 그것도 불안하다면 2~3배로 추천해 한 명을 뽑도록 하고, 급여는 거의 무보수로 하거나 자선단체 등에 기부하게 의무화하면 된다.

 투명경영을 약속한 롯데가 솔선해 이런 방식으로 사외이사를 뽑아봤으면 어떨까 한다. 정부와 국회는 일반 주주들이 연대해 사외이사를 추천할 수 있도록 관련 제도를 만드는 논의에 들어가길 바란다.

김광기 중앙일보시사미디어 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