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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광복절은 대한민국 건국을 기념하는 날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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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
전 주러시아 대사

70년 전 8월 15일은 우리 민족에게 믿기 어려운 감격의 날이었다. 36년간의 일제 식민지배로부터 우리가 해방되는 날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해방은 우리가 그날까지 고대했던 광복, 곧 독립의 회복이 아니었고 미군과 소련군에 의한 남북한 분할 주둔이었다. 더구나 38선 이북을 점령한 소련은 전 세계의 노동계급이 모스크바의 소련공산당 지휘 아래 단결하여 세계 공산화 혁명에 매진할 것을 독려하는 국가였다. 남북한 공동으로 선거를 치러 독립하게 하자는 유엔 총회의 결의안이 집행되지 못하고 남북한이 적대적 국가체제로 고착된 것은 희대의 독재자 스탈린의 개입 때문이었다.

 엄격한 의미에서 광복은 아직도 통일이 돼야 달성될 이상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5·10 선거로 이룩된 대한민국 건국은 광복이라는 목표가 적어도 남한에서는 달성되었음을 의미했다. 그래서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이 다시 독립한 것을 기념하는 독립기념일을 ‘광복절’이라고 부르자는 안이 채택되었다. 그 이전까지 일본의 항복을 지칭했던 표현은 ‘해방’이지 ‘광복’이 아니었고 3·1운동과 임시정부의 정신을 이어받는 나라를 세우는 것, 곧 건국은 모든 애국세력을 결집시키는 시급한 과제였다. ‘건국강령’ ‘건국준비위원회’ 등의 표현이나 대한민국 초대 내각의 인적 구성이 그러한 정황을 잘 대변한다. 1949년 8월 15일은 독립 1주기였고, 53년 8월 15일은 광복 5주년이지 8주년이 아니었다. (김대중 정부 초년인 98년까지도 우리 정부는 건국 50주년 기념우표를 발행했다.)

 우리 사회와 국회 일각에서 지금 ‘건국절’ 제정 움직임이 거세게 일고 있는 것은 언제부터인가 ‘광복절’의 기년을 1948년 대신 1945년에 맞춤으로써 광복이라는 말이 가지는 참뜻이 상실되고 역사적 기억에 혼란이 빚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광복을 위해 희생했던 독립투사들의 공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분들의 참뜻을 기리자는 것이 건국절 주창자들의 목적이다. 자주독립을 위해 투쟁했던 그분들 덕분에 우리 민족은 38선 이남에서나마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해 독립을 회복했고 비로소 우리나라 여권으로 세계 무대에 진출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소련과 유럽에서 공산주의 체제가 종말을 고하자 통일에 대한 우리의 기대가 부쩍 높아졌고 그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민족통일에 대한 국민의 갈망을 이용해 대한민국의 국가적 정통성을 부정하고자 하는 세력이 활개칠 수 있는 여지도 넓어졌다는 사실이다. 특히 2000년 남북 정상회담 이후 평화통일에 대한 열망이 국적 없는 통일지상주의의 유혹을 몰고 왔다. 우리가 이념적·정치적 주도권을 상실하는 순간 통일은 민족 전체의 해방과 복리의 증진을 의미하는 ‘대박’ 대신 노예의 길로 빠질 수 있는 길목이 될지 모른다. 그럼에도 이를 망각하고 마치 대한민국이 없어져야 통일이 된다는 망상에 젖어드는 현상마저 일어난 게 사실이다.

 아니라면 어떻게 ‘조선인민민주주의 공화국 건설’이라는 표현은 교과서에서 쓰면서 ‘대한민국 건국’이라는 표현은 ‘정부 수립’으로 고치라는 지시를 교육부 장관이 내릴 수 있었겠는가? 이를 놓고 대한민국이 건국된 것이 1919년이지 1948년이 아니라는 학설도 있기 때문이라는 엉뚱한 변명까지 내놓는 일이 벌어졌겠는가? 한편에선 국회의원 일부와 독립운동가 후손들임을 자랑하는 광복회가 앞장서서 대한민국은 1948년이 아니라 1919년에 건국되었다고 목청을 높이고 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나라 없는’ 백성이 되어 일본군 위안부로 유린당하는 고초를 겪어야 했고 광복군은 무엇을 위해 싸웠다는 말인가.

 대한민국 국민은 어쩌다 자기 나라가 언제, 어떻게 태어났는지도 모르는 국민이 되었는가. 역사를 왜곡한다고 일본이나 중국을 지탄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시급하게 해야 할 일은 자기 나라가 언제, 어떻게 자랑스러운 민주공화국으로 태어났는가를 스스로 상기하며 만국 앞에 기리는 일이다. 유구한 역사를 지닌 프랑스인들이 7월 14일을 최대 국경일로 경축하는 것은 프랑스 민족이 1789년에 태어난 것이 아니라 인권선언에 기초한 민주주의 국가로서 발족했음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미국이 7월 4일을 기리는 것은 그날이 영국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미합중국으로 독립했음을 상징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그 나라 국민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헌법적 가치가 국경일에 반영되는 것이다

 ‘광복’이란 단어는 우리의 민족정서 속에 깊이 배어 있는 익숙하고 소중한 말이다. 8·15 경축일을 광복절이라고 부르던 것을 건국절이라고 바꾸는 것은 정서적으로 쉽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광복이 자주독립을 의미한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적어도 오는 8월 15일은 ‘광복 70년’이 아니라 ‘해방 70년, 대한민국 건국 67년’을 기념하는 8·15 광복절임을 알고 기려야 할 것이다.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전 주러시아 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