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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일본의 군림은 불법” 러시아 황제에게 보낸 1905년 고종 친서 첫 공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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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고종이 러시아 니콜라이 2세 황제에게 을사조약 석달 전인 1905년 8월 22일 보낸 친서. ‘한국 황제의 친서’라는 제목의 10장짜리 문서에서 고종은 “일본의 독립 말살 행위는 불법”이라고 고발했다.

“대한제국은 4000년의 역사를 가진 독립국가인 반면, 일본은 1200~1300년대 들어 겨우 국가를 수립했다. 일본의 여러 풍습은 짐(朕, 황제가 스스로를 지칭하는 말)의 나라에서 유래됐으며, 글자도 짐의 나라 백성이 가르쳤다.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조상처럼 짐의 나라를 존경했으며, 짐의 나라와 감히 적대적 관계를 맺을 생각도 못했었다(중략)”.

 110년 전 대한제국 고종(1852~1919) 황제가 러시아 니콜라이 2세에게 보낸 친서의 일부다. 친서를 쓴 날짜는 1905년 8월 22일. 을사조약을 체결(11월 17일)하기 석 달 전이다. 친서는 일본에 글도 가르쳤고, 풍습도 전했음을 명시하고 있다. 그런데도 일본이 불법 침략을 했다고 고발하고 있다.

 “일본은 악랄하고 삼엄하게 짐의 나라 주권을 장악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가 이리도 슬픈 정황에 처한 원인은 국가가 허약해 방위도 할 수 없고, 권리를 지킬 수 없었던 까닭이다. 그렇다 해도 우리는 수차례에 걸쳐 독립국가임을 선포했다. 지금 일본은 확실히 짐의 나라에 군림해 독립을 말살시키려 하고 있으나, 불법인 것이다.”

 이 친서는 동북아역사재단 최덕규 연구위원이 제정러시아대외정책문서관에서 발견했다. 고종이 러시아에 친서를 보냈다는 기록은 있지만 친서에 담긴 내용이 공개된 건 처음이다. 본지가 최근 입수한 친서 사본은 ‘한국 황제의 친서’라는 제목의 10장짜리 문서다. 러시아어로 돼 있으며, 러시아 정부의 문서 정본임을 확인하는 도장이 날인돼 있다. 고종이 처음부터 러시아어로 된 친서를 보낸 것인지, 러시아 측이 한자를 번역해 보관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친서에서 고종은 “일본이 우리나라의 주권을 침탈하려는 음모를 꾸미지 못하도록 공사를 빨리 다시 파견해주시기를 눈물로 호소한다”고 했다.

최 연구위원은 “고종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해 9월 포츠머스 강화조약에서 러시아는 한반도에서 일본의 우월적 지위를 인정한다. 대한제국엔 고종황제를 견제하는 친일내각이 들어섰다”며 “이때부터 고종은 개인, 비선조직을 통해 대외정책을 펼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결국 이 친서는 고종이 정부를 대표해 마지막으로 가동한 공식 외교채널이었다. 고종은 친서에서 “이천만의 국민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심지어 닭과 개들조차 짖지 않을 정도로 살 수가 없다”고 비통해했다.

 광복 70년을 맞아 망국의 시대에도 빼앗긴 국권을 되찾기 위해 피눈물을 흘린 비운의 외교관들을 재조명하는 시리즈를 준비했다. 역사는 늘 교훈을 남긴다. 후손들은 그 역사에서 실패와 성공을 모두 배울 의무가 있다.

◆특별취재팀=유지혜·안효성 기자, 왕웨이 인턴기자, 김유진·송영훈 대학생 인턴기자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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