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남북 축구자매, 경기장 밖 ‘셀카 우정’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6면

남북 여자축구 대표팀 선수들은 경기장에서 한치 양보 없는 접전을 펼쳤다. 그러나 경기장 바깥에선 진한 우정을 나눴다. 지난 8일 시상식 후 1988년생인 김도연·조소현·권하늘·전가을·이은미(왼쪽부터 시계 반대 방향)은 동갑인 북한 공격수 나은심(오른쪽)과 다정하게 셀카를 찍었다. [사진 김도연]

“나 보고 싶었다며? 근데 왜 말 안 걸었어?”(북한 여자축구 대표팀 나은심)

 “응. 그냥. 크크. 근데 다들 평양 살아?”(한국 여자축구 대표팀 조소현)

 “응. 평양 살아. (지난달 여자 월드컵이 열린) 캐나다 좋았어?”(나은심)

 “그럼. 좋았어.”(조소현)

 “머리카락은 왜 잘랐어?”(나은심)

 ‘평양’을 ‘서울’로 바꾸면 평범한 소녀들의 수다 같은, 남북 여자축구 대표팀 선수들의 대화다. 한국 여자축구 대표팀은 지난 8일 중국 우한에서 열린 동아시안컵 3차전에서 북한에 0-2로 져 준우승을 차지했다. 3전 전승을 올린 북한은 2회 연속 우승에 성공했다.

 북한 공격수 나은심(27)은 한국전에 쐐기골을 넣어 총 3골로 득점왕에 올랐다. 나은심과 한국 주장 조소현(27·현대제철)은 시상식에 앞서 몰래 대화를 나눴다. 1988년생 동갑인 둘은 수 차례 국제대회를 치르면서 정이 쌓였다. 동아시안컵을 앞두고 나은심은 ‘조소현이 보고 싶어한다’고 전하자 “나도 만나고 싶다. 한겨레, 한 핏줄로서 통일만 되면 우리는 한 운동장에서 뛸 수 있다”고 말했다.

 그라운드에서는 서로 다른 유니폼을 입고 치열하게 싸웠다. 그러나 승부가 끝나자 이들은 친구로 돌아왔다. 조소현과 전가을(현대제철)·권하늘(상무)·김도연(현대제철)·이은미(이천대교)는 27세 동갑내기 나은심과 다정하게 셀카를 찍었다.

나은심은 이날 한국 여자축구 최초로 센추리클럽(A매치 100경기 출전)에 가입한 권하늘에게 “야, 니 오래도 있는다야~”라고 농담도 건넸다.

 남북 선수들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지만 남북 스포츠는 경색 국면이 풀리지 않고 있다. 동아시안컵 대회에서 북한 선수들은 한국 취재진이 국호를 북조선(혹은 북측)이 아닌 북한이라고 부르면 강한 적대감을 드러냈다. 북한 선수들은 입을 닫은 채

공동취재구역(믹스트존)을 빠져나갔다.

 북한이 우승했지만 분위기가 달라지진 않았다. 북한 김은향이 대표로 나서 “김정은 원수님의 드높은 사랑과 믿음에 보답할 수 있어 기쁘다”고 짧은 소감을 밝혔다.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은 선수들에게 축전을 보내 “장한 딸들을 열렬히 축하한다”고 치하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9일 전했다. 통신은 ‘당이 안겨준 불굴의 투지와 주체적인 전법으로 마지막까지 이악하게(끈덕지게) 싸워 우승함으로써 당과 조국·인민의 기대에 훌륭히 보답했다’고 덧붙였다. 선수들이 어울려 셀카를 찍을 때 북한 관계자는 “빨리 이동하자”고 북한 선수들을 독촉했다.

 남북 선수들은 같은 호텔 위·아래층에 묵었지만 거의 만나지 못했다. 정설빈(25·현대제철)은 “남북대결은 정치적으로 이어질 수 있어서 행동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웠다”고 말했다. 윤덕여(54) 한국 감독과 김광민 북한 감독은 1990년 통일축구에서 남북 화해 대결을 펼쳤다. 윤 감독은 “감시하는 사람이 있어서인지 김 감독이 눈길 한 번 안 주더라”고 서운해 했다.

 우승을 다투는 동안에도 남북 선수들은 물을 나눠 마시며 뛰었다. 경기가 끝나자 윤 감독과 김 감독도 우정의 악수를 나눴다. 그라운드에 주저앉은 한국 선수들을 김 감독이 위로하기도 했다.

 북한전에 나설 때마다 한국 선수들은 복잡한 감정이 생긴다고 한다. 조소현은 “북한 선수들이 자국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겠지만 다소 힘들어 보인다. 가끔 ‘얘네가 만약 지면 정말 탄광에 가는 게 아닐까’라며 혼자 걱정을 하기도 한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국제대회를 치를수록 서로를 위하는 마음이 커지는 것이다.

 북한 여자팀은 9일 아침 일찍 비행기를 타고 우한을 떠났고, 한국 여자팀은 정오께 한국으로 향했다. 남북 여자팀은 내년 2월 일본 오사카에서 열리는 2016 리우 올림픽 아시아 예선에서 다시 만난다. 조소현은 “북한과의 실력 차를 점점 좁혀가고 있다. 올림픽 예선 땐 북한을 이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우한=박린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