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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핵무기는 범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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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문정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15분. 섬광과 굉음, 그리고 하늘에 솟구쳐 오르는 버섯구름으로 일본 히로시마는 이내 아비규환의 생지옥으로 변했다. 미군이 투하한 단 한 발의 원자폭탄 위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투하 당일 5만 명 이상의 피폭자가 죽어갔고 그 해 말까지 사망자 수는 14만 명에 이르렀다. 4만 명이 넘는 조선인도 희생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난 8월 6일 원폭 투하 70년을 기리는 ‘피폭 희생자 위령식·평화기원식’이 히로시마에서 열렸다. 피폭 희생자 가족들과 일본인 상당수는 원폭 투하에 대해 “지금도 용서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가해자인 미국도 이 비극적 현장의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어 보인다. 더 큰 희생을 막고 전쟁을 조기에 종식하기 위해 원자탄을 투하했다고 정당화하지만 핵폭탄이 가져온 참상에 겸허해질 수밖에 없다. 승자 없는 전쟁의 모습이다.

 히로시마 현지의 반핵 분위기는 견고했다. 핵병기는 ‘절대악’이자 ‘악마의 무기’이며 ‘인류의 적’이라는 정서가 넘쳤다. “핵전쟁에 승자는 없고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전쟁”이라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84년 발언에 대한 광범위한 공감대가 형성됐다. 행사에 참석했던 아베 신조 총리도 비록 ‘핵무기를 만들지도, 가지지도, 반입하지도 않는다’는 비핵 3원칙을 언급하지 않아 구설에 오르긴 했지만 “우리는 유일한 전쟁 피폭국으로서 ‘핵무기 없는 세상’을 만드는 데 앞장서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다. 핵확산방지조약(NPT)은 핵군축과 핵 비확산 국제질서의 요체지만 4월 27일부터 5월 22일까지 미국 뉴욕에서 열린 5년 주기의 NPT 검토회의는 합의문 하나 채택하지 못한 채 폐막됐다. 핵무기 보유국인 이른바 ‘P5’(미국·러시아·중국·영국·프랑스)의 자국 중심주의와 이중 기준에 이스라엘의 핵무기를 둘러싼 아랍 국가들의 항의가 더해지면서 핵군축은 물론 핵확산 방지에 대한 어떤 합의도 이루지 못했던 것이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핵무기 확산 추세다. 전 세계 핵무기 1만6000기 가운데 90%를 미국과 러시아가 보유하고 있는 바, 그 상당 부분이 이 지역에 전개돼 있는 것이다. 중국·인도·파키스탄 모두 최근 들어 핵전력을 증강하고 있는 실정이다. 여기에 북한의 핵무기와 미사일 보유는 한반도와 동북아 전체에 커다란 위협이 되고 있다.

 50여 명의 전직 총리, 각료급 인사, 군부 지도자, 그리고 학계 및 언론계 인사로 구성된 ‘핵군축 및 비확산을 위한 아시아·태평양 지도자 네트워크’(APLN·좌장 개러스 에번스 전 호주 외무장관)는 피폭 70주년에 즈음해 히로시마 현지에서 연차회의를 개최했다. 한국에서는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과 천영우 전 외교안보 수석, 필자가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 채택된 ‘히로시마 선언’은 몇 가지 흥미로운 제안을 하고 있다.

 먼저 이 선언은 핵 위협을 줄이기 위해 기존의 핵무기 보유국들에 핵 독트린의 변경을 촉구하고 나섰다. 핵무기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고 핵무기 ‘불사용 규범’을 확산시켜 나가는 한편 우발적 핵무기 사용을 막을 수 있는 위기관리에 각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주문이다. 특히 핵무기를 억지 이외의 목적으로 ‘선제적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No First Use)’는 원칙을 강조하고 있다. 이를 위해 핵무기를 경계태세하에 놓거나 전진배치해서는 안 되며 핵무기를 공격 수단과 분리시켜 별도 보관해야 한다고 못 박고 있다.

 더불어 핵무기 숫자의 감축은 물론 미사일방어 체제나 장거리 정밀타격 자산같이 핵 군비 경쟁을 초래할 수 있는 재래식 전력증강에도 신중을 기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어떤 조건하에서도 이들이 ‘비핵 국가들에 대해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보장(negative security assurance)’해야 하며 핵 확산 우려가 점증하고 있는 동북아에 대해서는 ‘비핵무기 지대’를 선포하자는 제안 또한 담고 있다. 북한 핵에 대한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며 9·19 공동성명 이행을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모색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특히 이 선언에서는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핵무기를 반인륜적 범죄로 규정하고 이를 지구상에서 영원히 퇴출하기 위한 ‘핵무기 불사용 협약’의 채택과 동참을 호소하고 있다.

 이러한 권고가 이상적으로 들릴지 모르나 히로시마에서 되돌아본 핵병기의 파괴성과 그 폐기 작업의 절박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어 보인다. ‘절대무기’가 부과하는 ‘절대공포’가 그 어느 지역보다 높은 동북아의 복판에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더욱 그렇다. ‘핵무기 없는 세상’-. 히로시마 피폭 70주년이 인류에게 던지는 절체절명의 메시지다. <히로시마에서>

문정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