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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철조망으로 만든 피아노 … 서울 복판에 북 선전 포스터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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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요즘 내로라하는 전시장을 가면 온통 키워드가 ‘분단·북한’이다. 광복·분단 70주년이라는 ‘캘린더성’ 기획에서 비롯되긴 했다. 그런데 작품들 면면을 보면 ‘아하’ 소리가 절로 나는 기발함이 넘친다. 한국 미술사나 현대예술 기법을 몰라도 ‘분단 현실을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구나’하고 무릎을 치게 된다.

광복 70년, 달라진 분단예술 전시
위상 높아진 분단미술
70년대 금기, 80년대 용공 시비 단골
최근 들어 색깔론 벗고 핫한 이슈로

  서울 종로구 삼청로의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지하 1층. 제2전시실 한쪽 벽 빔프로젝터에 철모를 쓴 군인들이 요한 슈트라우스의 왈츠 음악에 맞춰 빙빙 도는 영상이 흐른다. 자세히 보니 서로 껴안을 듯 다가섰다가 헤어지기를 되풀이하는 모습이다. 미디어아티스트 전준호(46) 작가의 3D 애니메이션 ‘하이퍼리얼리즘-형제의 상’(2008)이다. 용산 전쟁기념관의 11m 높이 조형물 ‘형제의 상’(윤성진 등·1994)을 모티브로 삼았다.

  원래 조형물의 소재는 한국전쟁(1950~53) 당시 적으로 조우한 군인 형제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2004)의 모티브가 되기도 한 실화다. 분단의 아픔을 상징하는 이 조형물이 전 작가의 작품에선 블랙코미디처럼 변주됐다. 이 전시회 ‘소란스러운, 뜨거운, 넘치는’전(10월 11일까지)을 기획한 박혜성 큐레이터는 “광복 70주년을 맞아 분단 현실을 젊은 세대가 이해할 수 있게 감각적으로 풀어낸 작품이라 골랐다”고 말했다.

  서울 서소문 서울시립미술관 로비에 가면 피아노가 한 대 놓여 있다. 이름하여 ‘통일피아노’. 수명이 다 돼 교체된 최전방 휴전선 철조망을 피아노 현으로 사용했다. 이 작품은 기성 아티스트의 것이 아니다. 광고회사 제일기획의 이성하(32) 카피라이터가 기획해 월드뮤직그룹 공명이 제작했다. 지난해 프란치스코 교황 방문 당시 서울대교구에서 폐철조망으로 만든 가시면류관을 선물한 데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이씨는 “피아노는 화음이 생명인데 철조망 현을 이용하면 어떤 소리가 날지 궁금했다”고 했다. 일반 피아노와 달리 둔탁한 쇳소리가 나는 ‘통일피아노’에 관객들은 “신선하다, 신기하다”고 호응한다.

  분명 분단·통일을 얘기하는데 무겁지가 않다. 흔한 말로 이산의 한(恨)을 토로하는 게 아니다. 감상하는 관객도 여느 현대미술을 대하듯 호기심을 드러낸다.

  한발 나아가 북한 미술을 민낯 그대로 보여주기도 한다. 서울시립미술관 본 전시회인 ‘북한 프로젝트’(9월 29일까지)는 들어서자마자 시각적 충격을 준다. 가로 45m짜리 벽 전체를 메운 형형색색의 북한 체제 선전 포스터와 유화 때문이다. ‘모두 다 찬성 투표하여 혁명 주권을 튼튼히 다지자!’ 등의 문구가 즐비하다. ‘수송전사 김학실’(만수대창작사 작)이라는 제목의 유화는 비바람을 뚫고 지프를 운전하는 북한 여군을 담았다. 북한 선전화가 백주에 서울 공공전시관을 메우다니, 수년 전만 해도 상상도 못할 일이다.

  무엇이 달라진 걸까. 197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 화단에서 북한·분단은 금기어나 다름없었다. 체제 대결이 극심했던 시대다. 80년대 이후 민중미술계열 신학철·임옥상·홍성담·오윤 등 작가들이 리얼리즘 회화로 분단을 담아냈지만 곧잘 용공성 시비에 휩싸였다. 90년대 민주화 이후 이 같은 색깔론은 사그라들었다. 대신 리얼리즘 화폭에 담은 분단·북한이 주목 받는 일도 줄었다. 이미 사회 전체적으로 체제 대결보다 ‘통일 이후’에 관한 논의가 활성화했기 때문이다.

  이러자 민중미술 작가군이 분단을 표현하는 방식도 달라졌다. 대표적인 작가가 ‘대나무 설치미술’로 유명한 최평곤(54)이다. 2007년 제작한 연작 ‘통일 부르기’는 파주 임진각 잔디 언덕에 각각 10m·7m·5m·3m에 달하는 인간 형상 구조물이 북쪽을 향해 서 있는 모습이다. 안보관광을 위해 임진각을 찾는 내외국인들이 첫손에 꼽는 관광명소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요즘 뜨는 젊은 작가들이 있다. 이들은 분단 이슈에 접근하는 경로 자체가 다르다. 경계와 탈경계, 일상과 예술 등 현대적 문제의식을 풀어가다 그 연장선상에서 분단 현실을 얘기한다. 이를 테면 전소정(33)은 영상·드로잉·오브제·퍼포먼스 등 다양한 매체를 이용해 일상과 예술의 경계를 탐험하는 작업을 해왔다. 신작 ‘먼저 온 미래’(2015)는 탈북 피아니스트 김철웅과 남한 피아니스트 엄은경이 서로 협의하면서 하나의 음악을 완성·연주하는 과정을 담았다. 전 작가는 “김씨가 이야기하는 북한과 내가 상상한 북한의 온도 차가 컸다. 이념적 대립을 예술적 상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지 궁금했다”(일간지 인터뷰)고 했다.

  통일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아도 현란한 미디어아트 속에 ‘분단의 정체성’이 드러나는 것. 요즘 국제적으로 잘나가는 작가의 공통점이다. 2007년 뉴욕타임스(NYT)가 “강력하고 생각을 환기시키는 예술(powerful, thought-provoking art)”이라고 평했던 전준호의 작품들은 외국 갤러리·비엔날레의 단골 초대 대상이다. 2011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의 대표작가로 선정됐던 이용백(49)도 현란한 꽃무늬 전투복으로 위장한 군인들을 담은 ‘에인절 솔저’(2005) 등에서 분단 현실을 은유했다.

  “‘지구상 유일한 분단국가’가 외국이 보는 한국이다.” 지난해 베니스비엔날레 국제건축전에서 한국관 기획으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조민석 커미셔너의 말이다. 그의 말은 분단이 ‘핫’한 소재로 떠오른 현재 미술계의 분위기를 반영한다. 당시 남북한 건축을 나란히 보여준 ‘한반도 오감도’는 “놀랍도록 기묘하다(Wonderfully Bizarre)”는 찬사를 들었다. 전후 남한과 북한이 서로 다른 도시설계와 건축 길을 걸어왔음에도 유사성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베니스비엔날레 최고상 수상은 한국관 설립 이후 19년 만에 미술·건축 통틀어 처음이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분단을 말하는 작품은 흔해진 반면 남북 관계는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다는 사실이다. 간간이 이어지던 남북 문화교류도 2010년 이명박 정부의 5·24 조치 이후 뚝 끊긴 거나 마찬가지다. 이 때문에 현재의 작품·전시 트렌드가 엄연한 분단현실을 도외시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2010년 대전시립미술관 특별전 ‘분단미술-눈 위에 핀 꽃’을 기획했던 김준기 미술평론가는 “최근 일부 작품들에서 분단은 리얼리즘이라기보다 일종의 판타지이자 예술적 발언의 소재일 뿐”이라고 말했다. 분단·통일에 대한 치열한 성찰 없이 마치 관광객의 시각으로 분단 현실을 그린다는 것이다. ‘외국에서 잘 먹히는 소재’를 작품 리스트에 추가하려는 상업주의라는 의혹도 있다.

 그러나 지금의 전시들이 동시대 관객에게 분단·북한을 인식시키는 데 성공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작가들이 즐겨 쓰는 비디오·음악·3D 가상현실체험 등 매체도 정보기술(IT) 세대의 입맛에 맞다. 가장 현대적인 예술언어로 가장 한국적인 이슈를 체험하게 된다. 선승혜 서울시립미술관 학예부장은 이것을 ‘트라우마의 치유’라는 관점에서 설명했다.

  “지금 작가나 관객은 모두 분단 한국에서 태어났다. 예전엔 이 사실을 인정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거나 고통이었다. 요즘 세대는 ‘그래서 어쩔 거냐’라는 쪽이다. 통일에 대한 무관심이다. 지금 전시회들은 제3의 길이 있음을 보여준다. 분단을 쿨하게 인정하고 북한을 공포감 없이 직시하는 것. 환영(幻影)을 통한 현실의 환기. 그게 예술이 할 일 아닐까?”

글=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사진=오상민 중앙일보시사미디어 기자

[S BOX] 희소성 덕분에 … 북한 유화 수십만 달러 낙찰, 우표·화폐·채권도 인기

  지난해 11월 영국 런던 북부 주택가에 위치한 주영 북한대사관에서 특별한 전시회가 열렸다. 공관 1층 라운지에 북한 만수대창작사 소속 화가들의 작품 130점이 걸렸다. 주영 북한대사관이 외부에 공간 시설을 개방한 것은 처음이었다. 나흘간 5000여 명이 다녀가 20점가량 팔렸다.

  작품은 대부분 영국 금융업자이자 미술거래상인 데이비드 히서(53)의 컬렉션에서 나왔다. 2002년부터 북한 미술을 모으기 시작한 그는 현재 포스터 원화 500여 점과 유화 1000여 점을 갖고 있다. 히서는 전화 인터뷰에서 “북한 미술은 현대 서구 미술과 전혀 다른 차원에서 뛰어난 기술을 지녔다”며 “새로움·다름·폐쇄성 등이 수집가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고 말했다.

  투자 목적도 있다. 소련이 붕괴하고 중국이 현대미술화법으로 옮겨간 지금 북한은 지구상에서 유일한 ‘사회주의 사실주의 미술’의 수호자다. 희귀성은 컬렉션의 중요 기준이다. 중국 베이징 경매장에서 북한 유화가 수십만 달러에 낙찰되기도 한다. 북한 우표도 비슷한 이유로 인기를 끈다. 북한이 1946년 이후 발행한 공식 우표 6500여 종의 99%를 소장하고 있는 신동현 컬렉터는 “되팔 때마다 두세 배 가격이 오르는 추세”라고 말했다.

  북한 붕괴 이후를 내다보는 투자도 활발하다. 화폐·채권이 대표적이다. 동서독 통합 전례를 보면 당시 화폐 교환비율을 거의 등가로 설정해 동독 화폐 보유자가 큰돈을 벌었다. 남북한도 화폐 교환비율 설정에 따라 수익이 발생할 수 있다.

  북한 국채도 마찬가지다. 통일 한국이 북한 채무를 떠안게 되면 일정한 헤어컷(손실 분담)을 감안해도 북한 채권 투자자가 이익을 낼 수 있다. 상품 투자의 귀재 짐 로저스(로저스 홀딩스 회장)는 최근 몇 년 싱가포르 국제통화박람회 등에서 북한 돈을 집중 매입해 눈길을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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