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이훈범의 생각지도

광복절 특사 유감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6면

이훈범
이훈범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훈범
논설위원

파리 특파원 시절 신호위반으로 단속된 적이 있다. 사실 경찰의 보복성 과잉단속이었다. 느릿느릿 가던 경찰차를 보란 듯 추월한 괘씸죄였다. 길 모퉁이에 공간을 발견하고 주차하려는데 세우고 보니 횡단보도를 제법 차지한 거였다. 안 되겠다 싶어 그냥 가는데 뒤따라온 경찰이 차를 세웠다. 내가 보행신호를 무시하고 횡단보도를 지나쳤다는 것이다. 자초지종을 설명했지만 자존심 상한 경찰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다부진 체격에 대테러부대(GIPN) 마크가 선명했던 경관은 고압적 자세로 신분증 내놔라, 트렁크 열어봐라 까탈을 부렸다. 최후수단으로 인종차별 운운하며 은근한 협박(?)까지 해봤지만 코웃음만 돌아왔을 뿐이다.

 경관은 6개 위반 종목 중 가장 중죄인 6번에 표시한 스티커를 발부했다. 프랑스에서 모든 경찰이 교통위반 단속권이 있는 건 알았지만 대테러부대 요원이 범절 없게(?) 교통위반 딱지까지 들고 다니는 줄은 그때 처음 알았다. 5번까지는 해당 범칙금이 써 있었는데 6번은 공란이었다. 낼 수 있는 가장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이건 뭐냐”고 물었더니 “법원에서 통보가 갈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경찰의 뒤통수에 대고 나도 코웃음을 쳐주었다. 화가 난 탓도 있지만 믿는 구석이 있었던 까닭이다. 프랑스 대통령 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던 것이다. 프랑스에선 대선 후 승리자가 대사면으로 자신의 관대함을 과시하는 전통이 있다. 그래서 대선 몇 달 전부터는 범칙금 스티커를 받아도 그냥 버리는 사례가 잦다는 걸 알고 있던 터였다.

 한 달쯤 뒤 통보장이 날아왔다. 60유로의 범칙금을 부과하고, 불복할 경우 재판을 신청하라는 내용이었다. 거창하게 법무부 장관 앞으로 편지를 썼다. 억울함을 항변하고 경찰의 인종차별적 태도에 위협을 느꼈다고 했다. 언감생심 법무장관이 내 편지를 읽으리라고는 기대도 안 했다. 그저 사면 때까지 시간을 벌자는 계산이었다. 예상대로 자크 시라크 대통령은 대선 승리 후 대사면을 단행했다. 그런데 이게 웬 일. 교통법규 위반이나 음주운전 같은 사례는 사면 대상에서 제외한다는 게 아닌가. 사람의 목숨을 위협할 수 있는 사안은 아무리 경미한 것이라도 용서될 수 없다는 거였다. 낭패였지만 말인즉슨 옳은 말이었다.

 개인적 실패담을 장황하게 늘어놓은 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는 생각에서다. 광복절 특사의 대상 규모가 200만 명이 넘는다는 얘기가 들리는 까닭이다. 교통법규 위반은 물론 음주운전까지 포함될 거란 보도도 있다. 가벼운 절도범죄까지 고려된다는 믿지 못할 소리도 나온다.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건 대규모 특사가 국민통합과 국민 사기 진작의 일환이라는 거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음주운전자, 절도범들과 통합을 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겠다. 동네 이면도로에서 무단횡단을 한 번 해도 뒤통수가 따가운 게 대다수 선량한 시민들이다. 그들은 아무리 급해도 취한 손으로 핸들을 잡지 않고, 아무리 살기 힘들어도 남의 물건에 손을 대지 않는다. 그런데 그런 범죄를 두고 실수나 생계형을 말하는 건 가난해도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온 대다수 시민들의 사기를 되려 꺾는 짓이다.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삶을 포기하면서도 전 재산 70만원을 집세로 남기고 “미안하다”고 유서에 썼던 송파 세 모녀를 두 번 죽이는 일이란 말이다.

 재벌총수들을 사면할 때 하더라도(경제활성화를 위해서라는데 결코 동의하진 않지만) 이런 들러리를 세워서야 되겠나 싶다. 나처럼 잘못을 하고도 꼼수나 생각하는 사람들을 양산하는 결과밖에 뭘 더 얻겠나. 우리 대통령이 그토록 강조하던 ‘원칙’에 어긋나는 일을 왜 하려는지 모르겠다. 광복 70주년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그래선 안 된다. 지금 프랑스에서 범칙금 스티커를 길에 버리는 사람은 사라진 지 오래다. “쉽사리 용서해 주면 잘못을 반복시킨다”는 프랑스 속담은 이 땅에서도 유효하다.

이훈범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