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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컨, 킹 목사, 잡스까지 … 할리우드 주연 꿰찬 영국 배우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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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브리티시 인베이전(British Invasion, 영국의 침공)’. 1960년대 비틀스를 위시한 영국 가수들이 잇따라 미국 음악계에서 큰 성공을 거둔 사건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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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잊혀졌던 이 말이 다시 회자되고 있다. 이번엔 영국 배우들이 할리우드를 ‘침공’하고 있다. 이른바 ‘브리티시 인베이전 인 할리우드’(British Invasion In Hollywood)다. 배트맨·스파이더맨 등 미국의 수퍼히어로는 물론, 마틴 루서 킹·스티브 잡스 등 미국 역사의 아이콘 같은 인물까지 영국 배우들이 배역을 꿰차고 있다.

 ‘셀마’ ‘언브로큰’ ‘노예 12년’ ‘링컨’ 등은 미국 역사의 상징적인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다. ‘셀마’는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서 킹 목사의 투쟁을, ‘언브로큰’은 제2차 세계대전 때 850일간 일본군의 포로생활을 견뎌낸 루이 잠페리니의 인간승리를 그렸다. ‘노예 12년’은 1841년 뉴욕에서 자유인으로 살다가 인신매매를 당해 12년간 노예생활을 했던 흑인 솔로몬 노섭을, ‘링컨’은 미국의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을 다뤘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을 연기한 배우가 모두 영국 배우란 사실이다. 데이비드 오예로워(마틴 루서 킹), 잭 오코넬(루이 잠페리니), 치웨텔 에지오포(솔로몬 노섭), 대니얼 데이 루이스(링컨) 등이다.

 이런 현상은 현재 만들어지고 있는 할리우드 영화에서도 계속되고 있다. 마이클 패스벤더가 ‘스티브 잡스’에서 스티브 잡스를, 톰 히들스턴이 ‘아이 소우 더 라이트’에서 미국 컨트리 음악의 거장 행크 윌리엄스를, 벤 위쇼가 ‘인 더 하트 오브 씨’에서 미국 소설가 허먼 멜빌을 연기한다. 이에 앞서 클라이브 오웬은 ‘헤밍웨이 & 겔혼’에서 미국의 대표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를 연기했다.

 미국산 수퍼히어로 영화는 일찌감치 영국 배우들에게 점령당했다. ‘맨 오브 스틸’ 이후 계속 슈퍼맨 역을 맡고 있는 헨리 카빌,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배트맨 시리즈에서 주인공으로 활약한 크리스천 베일, 새로운 스파이더맨으로 낙점된 톰 홀랜드는 모두 영국 출신이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 엔터테인먼트 업계에 취업하기 위한, 영국 배우와 감독의 비자 발급건수는 전년도에 비해 500% 증가했다.

 할리우드가 영국 배우들에게 러브콜을 보내는 이유는 탄탄한 연기력 때문이다. 베네딕트 컴버배치, 톰 히들스턴 등 대부분의 영국 배우들은 유수의 연기학교를 졸업하고 연극 무대에서 경험을 쌓은 뒤, 드라마나 영화로 진출한다. 할리우드의 유명 프로듀서 제임스 립턴은 미국 연예매체 엔터테인먼트 위클리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의 연기 교육이 감정 표현에 치중돼 있는 반면, 영국의 연기학교는 발성과 자세, 육체적 표현은 물론 전형성에서 탈피한 유연한 연기를 강조한다”고 말했다. 링컨의 어투를 복사하다시피 한 대니얼 데이 루이스 등 영국 배우들이 미국식 영어 구사에 어려움을 겪지 않는 건 이 같은 기본기가 갖춰졌기 때문이다.

 연극의 본고장인 뉴욕 브로드웨이와 영화·드라마 산업의 중심지 할리우드가 멀리 떨어져 있는 미국과 달리, 드라마·영화·연극 등 연기의 커뮤니티가 런던을 중심으로 형성돼 있는 점이 영국 배우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한다는 분석도 나온다. 드라마와 연극을 넘나들며, 다양하고 풍부한 연기력을 쌓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 전화 스카이프 등 영상통화를 통한 오디션이 가능해지면서 영국 배우들의 할리우드 도전이 보다 쉬워진 측면도 있다.

 영국 배우들이 주요 배역을 싹쓸이하는 현상에 대해 할리우드 일각에선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미국의 유명배우 마이클 더글러스와 스파이크 리 감독은 최근 “중량감 있는 역할을 소화할 수 있는 스타급 남자 배우를 왜 배출하지 못하는지 업계 전체가 진지하게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연기력보다 스타성을 중시하는 배우 양성시스템을 개선해야 한다는 얘기다.

  정현목 기자 gojh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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