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믿음] 좋은 말씀의 조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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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8호 27면

교회를 성장시키려면 세 가지 조건을 갖추면 된다고 한다. 교인들이 졸지 않고, 다음 일요일에 또 오고, 친구를 데리고 오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설교를 들은 교인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최악의 답변은 “조느라 설교를 못 들었습니다”가 될 것이지만 그 다음 최악은 “좋은 말씀인데 제가 그대로 살지 못해요”라는 말이다. 설교자가 설교를 잘 못했다는 뜻이다. 뭐라고 설교했기에 성도들이 “옳은 말이지만 내가 그렇게 살지 못해 괴롭다”고 말하겠는가.

 목표를 제시하면서 목표에 이를 수 있는 길을 제시하지 않은 것이고, 목표에 이를 수 있는 힘을 부여하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에 대해 말했지만 하나님을 경험하도록 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은혜를 가르치지 않고 율법을 가르쳤다는 말이다. 율법을 가르친다는 말은 “이렇게 해야 됩니다”라고 엄격한 원칙을 제시하는 것이다. 말은 맞지만 듣는 이로 하여금 그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하지는 못한다. 죄의식을 불러일으키고 위축되게 만든다. “해야 하기 때문에 할 수 있다”는 말은 비장하게 들리지만 허위다. 그게 사실이라면 인류는 오래전 개과천선했을 것이다.

 반대로 은혜를 가르친다는 말은 마땅히 행할 바를 말하기에 앞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것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당신의 사랑을 확증하셨다.” 이것이 은혜다.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이 복음이다.

 역설적으로 들리지만 율법을 가르치면 사람들은 위축되고 행할 의지를 얻지 못하지만 은혜를 가르치면 위로와 평안을 얻어 무언가를 행하고자 하는 용기를 얻는다. 은혜를 말한다는 것은 종교인의 입장을 말하지 않고 예수님의 입장에서 말한다는 뜻이다. 종교인들은 돌을 던지려 하지만 예수님은 돌을 던지는 자들로부터 보호하신다.

 가장 신약성경적인 설교는 예수님을 경험하게 하는 설교다. 예수님이 회당에서 설교하시는 중에 귀신 들린 사람으로부터 귀신이 떠나간 것이 좋은 예다.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찾아가 설교를 하는 중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신 것이 전형적인 예다. 물론 여러분이 설교를 할 때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낙심할 필요는 없다. 이런 사건은 성경에서도 극히 극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원칙은 은혜로운 설교는 듣는 이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날 이대로 사랑하시는구나. 나는 복을 이미 받고 있구나”라고 기뻐할 수 있게 하고 주님을 경험하도록 돕는 설교라는 것이다. 주님이 주시는 말씀을 대언할 수 있다면 열이면 열 은혜로운 설교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잘하는 설교는 교회를 처음 찾아 온 사람이 “기독교가 이런 것이라면 왜 나는 더 일찍 믿지 않았을까? 나의 편견과 실제 기독교는 많이 다르구나”고 느끼게 해야 된다. 어떻게 하면 이런 설교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바리새인의 입장에 서지 말고 일반인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면 된다. 예수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점을 명심하면 된다. 그러므로 이미 잘 믿는 사람을 위한 설교를 하려 하지 말고 교회를 처음 찾아 온 사람도 배울 것이 있는 설교를 하면 된다. 그 관점에서 성경을 읽으면 이전에 보지 못했던 것이 보인다. 인류를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의지가 보인다.



김영준 소망교회 부목사를 지낸 뒤 2000년부터 기쁜소식교회 담임목사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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