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건 소중히 여긴 걸 안다는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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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인의 삶을 보여주기 위해 오손 웰즈는 그의 지인도 순차적으로 배치한다. 유년시절 케인의 후견인이었던 은행가 대처는 고인이 되었기에 그가 남긴 비망록이 대신한다. 언론인이자 직장 후배인 번스틴, 친구 르랜드, 두 번째 부인 수잔, 그리고 집사 레이몬드를 통해 관객들은 처음 보았던 부고 영상보다 더 자세하게 케인에 대해 알게 된다.

그렇지만 이들 중 누구도 로즈버드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때문에 케인이 정말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들이 정확히 모르고 있다는 인상을 관객들은 받게된다. 모두 자기의 관점에서, 혹은 자신의 삶을 정당화하기 위해, 케인을 일정 정도 왜곡해서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이 웰즈가 이 영화로 말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아무리 친해도 그 누구도 타인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진리! 웰즈는 이것을 바로 ‘로즈버드’라는 케인의 유언에 응축시켰던 것이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웰즈는 관객들에게 한 가지 느낌을 갖도록 만든다. 로즈버드가 무엇인지를 모른다면, 아무리 케인과 가까운 사이라 하더라도 케인을 안다고 할 수 없다는.

이같은 웰즈의 탁월함은 마지막 장면에서 절정을 이룬다. 집사 레이몬드와의 인터뷰가 끝날 무렵, 케인의 대저택은 분주하기 이를 데 없다. 수집품 정리 때문이다. 사회적 평판, 친구, 애인 등 거의 모든 것을 잃은 케인은 물건을 수집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자신의 상실을 무언가로 보충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주인이 사라진 소장품들은 남겨진 사람들의 입장에 따라 분류된다. 남은 사람들 눈에 별 가치가 없어 보이는 물건들은 거대한 벽난로에 던져진다. 덧없이 사라져가는 물건 하나에 웰즈는 카메라 앵글을 맞춘다. 흔하디흔한 목재 썰매. 그런데 썰매 표면에 뭔가 보인다. 장미꽃 봉오리 문양과 함께 ‘로즈버드’라는 선명한 상표가.

한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

한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가장 소중하게 여긴 것을 이해한다는 것과 같다. 로즈버드는 케인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였다. 그런데 이제는 아무도 로즈버드가 무엇인지 모르게 되었다. 그를 가장 안다고 했던 다섯 사람들은 로즈버드가 무엇인지를 몰랐다. 한 사람이라도 알았더라면, 어떻게 그것이 벽난로에 던져질 수 있다는 말인가.

연기와 재로 소멸된 로즈버드와 함께 케인은 이제 정말 우리 곁을 떠나간 셈이다. 아무리 그를 기리는 영상이 만들어진다고 해도, 그를 기억하는 지인들이 회고록을 쓴다고 해도, 남겨진 자들이 기억하는 케인은 그저 쭉정이에 불과한 것 아닐까. 그가 소중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사라지고, 남겨진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만 남겨졌으니 말이다. 결국 벤야민의 말처럼 죽은 자의 삶은 남겨진 자들의 값싼 먹잇감으로 전락할 뿐이다.

영화에는 케인을 알고 있다고 확신하는 자들이 등장하지만, 그들의 확신은 로즈버드가 무엇인지 모르기에 허구이자 오만다. 반면 영화를 끝까지 본 관객들은 로즈버드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 후견인에게 거의 반강제적으로 끌려갔던 소년 케인, 그리고 주인을 잃고 눈에 덮여가던 그 쓸쓸한 눈썰매를 보았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유품 속에 들어있던 눈썰매.

자, 웰즈는 이제 우리에게 묻는다. 로즈버드가 무엇인지 알게 된 당신은 이제 케인이란 사람을 안다고 할 수 있는가. 케인의 유언속 ‘로즈버드’가 정말 그 썰매를 가리키는가. 그게 썰매를 가리킨다 하더라도 그것이 얼마만큼 케인의 삶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일까.

잘 안다고 생각한 사람이 낯설어질 때

지금 죽음에 임박한 사람이 헐떡이면 내뱉는 마지막 단어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 마지막 말이 ‘찔레꽃’일 수도 ‘리자드’일 수도, 아니면 전혀 모르는 사람의 이름일 수도 있다. 바로 이 때, 떠나려는 사람을 잘 알고 있다는 우리의 오만은 여지없이 좌절되고 만다.

혹은 이 순간 죽은 자의 유품을 정리하며 당혹감에 멈추어 선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그것은 어머니의 옷장에서 발견된 한 번도 보지 못한 ‘참빗’일 수도, 아버지의 책을 정리하다 책갈피 속에서 떨어진 ‘편지’일 수도, 누나의 방을 정리하다가 찾아낸 어느 남자의 사진 한 장일 수도 있다. 이때에도 우리는 친숙했던 고인이 하염없이 낯설어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다 그들만의 ‘로즈버드’인 셈이다. 이제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그들이 남긴 로즈버드를 다른 유품과 함께 태워버려도 된다. 아니면 하나의 수수께끼로 가슴에 품고 그것을 해명하려는 모험, 결코 완결될 수 없는 모험을 떠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마침내 그 수많은 낯선 것들이 무엇인지를 안다고 해도, 진실로 우리는 고인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정말 모를 일이다.

강신주 대중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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