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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노동당의 ‘퇴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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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애 기자 중앙일보
고정애
런던특파원

넥타이를 매지 않는 정치인이 있습니다. 철도와 가스·전기를 다시 국유화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부자에 대한 과세를 요구하며 긴축에 반대합니다. 반핵주의자이기도 합니다.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를 떠올릴 수 있겠습니다. 실제론 치프라스를 닮고 싶어 하는 영국 정치인 제러미 코빈(66)입니다.

 32년간 의원 배지를 달았지만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는 ‘변방’의 정치인이었고 앞으로도 그래야 할 정치인인 그가 제1야당인 노동당의 당수가 될 수도 있는 입장이 됐습니다. 당수 경선을 20여 일 남긴 가운데 나온 여론조사에서 후보자 4명 중 1위를 기록했습니다. ‘코빈 당수’가 현실화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다른 후보자들과 달리 지지가 열렬합니다.

 지난 5월 총선에서 노동당이 대패한 건 에드 밀리밴드 전 당수의 좌향좌 때문이란 게 영국 정가의 공감대입니다. 코빈은 훨씬 더 왼쪽에 있는 인물입니다. 그가 당수가 된다면 노동당은 더욱 왼쪽으로 이동할 겁니다.

 그렇다면 왼쪽 공간이 넓은 걸까요? 전혀 아닙니다. 오랜 아성이었던 스코틀랜드는 좌파 성향의 스코틀랜드국민당(SNP)에 빼앗긴 상태입니다. 결국 잉글랜드에서 만회해야 한다는 계산인데 오히려 파고드는 건 보수당입니다. ‘일하는 사람’을 위한 정당을 자처합니다. 생활 임금을 도입하는 등 왼쪽의 정책을 차용합니다. 이런 가운데 코빈의 당선은 노동당이 중원을 보수당에 내주고 자신들의 주둔지로 퇴각하겠다는 신호입니다. 다음 총선인 2020년의 승리도 기약할 수 없게 됩니다. 노동당 출신 총리인 토니 블레어가 코빈 지지 현상에 대해 “반동적”이라고 공개 비판한 배경입니다.

 그럼에도 이 같은 일이 벌어지는 건 일종의 ‘집단 극화’ 현상과 맞물려 있습니다. 밀리밴드 시대에 중도 성향의 지지층이 이탈했습니다. 대신 왼쪽 성향의 노조원들이 유입됐습니다. 지난 총선에선 민심에 예민할 수밖에 없는 경합지역 출신 노동당 의원들이 줄줄이 고배를 마셨고 텃밭의 의원들만 생환했습니다. 의원들의 스펙트럼도 덩달아 붉어진 겁니다. 이에 지지층이 추가로 이탈합니다. 점차 지지자 입장의 중간 값도, 논의도 더 왼쪽으로 가는 겁니다. 정당처럼 지지를 쉽게 철회할 수 있는 집단에선 이런 극단화 가능성이 큽니다. 우리식 용어론 당심과 민심의 괴리입니다. 당내 선거에선 백전백승이지만 전체 선거에선 필패하는 구조 말입니다. 코빈이 뜨는 자양분입니다.

 영국의 식자층에선 걱정이 많습니다. 상대적으로 노동당에 애정이 있는 가디언이 “아날로그 같은 경선”이라고 비판했습니다. 보수적 성향의 이코노미스트도 “야당이 지리멸렬한 내향적 상태는 영국에도 나쁘다”고 말합니다.

 이들 우려에 십분 공감하게 되는 건 못지않은 우리 야당 ‘덕분’일까요.

고정애 런던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