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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숙의 ‘新 名品流轉’] 열화당 200주년 … 백범 육성으로 이어지다

중앙일보

입력

22세기나 23세기에 지금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주거 양식으로 살아남을 건물은 무엇일까. 철근 콘크리트 구조물의 수명을 생각해보면 아파트나 오피스빌딩은 사진 자료 정도로나 남지 않을까 짐작된다. 잘 관리해도 50~100년을 버티기 힘들다니 부수고 또 짓는 재건축의 잔해가 지구를 뒤덮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지난 1월, 이슬람화된 프랑스의 2022년 미래를 그린 소설 『복종』을 펴내 화제가 됐던 소설가 미셸 우엘벡은 이미 5년 전에 유럽 산업시대의 종말을 아래와 같이 경고했다.

“울창한 식물들이 옛 공장들을 점령하고 폐허 속을 파고들어 점차 뚫고 들어갈 틈이 없는 정글을 이루었다. (…) 얼마간 발버둥 치다가 이내 완전히 묻혀버리고 만다. 이윽고 정적이 흐른다. 오직 바람에 풀들만이 하늘거릴 뿐. 식물의 압승이다.” (소설 『지도와 영토』 중에서)

이런 우울한 전망 속에서도 놀라운 지속력을 자랑하는 건축물 기록이 위안을 준다. 올해로 지은 지 200년을 맞은 강릉시 운정길 63 열화당(悅話堂)도 그런 힘 있는 집의 하나다. 건물 아홉 동, 총 102칸의 국내 최대 규모 살림집인 선교장(船橋莊) 사랑채 중 한 채로 1815년 건립했다는 문헌이 남아 있다. 열화당이라는 집 이름은 중국 시인 도연명의 ‘귀거래사’ 중 “친척들의 정다운 이야기를 즐겨 듣는다”는‘열친척지정화(悅親戚之情話)’라는 시구에서 빌려왔다. 가족이 모여 오순도순 정담을 나누던 수다방에서 출발한 열화당은 뒤에 공부방 겸 도서관으로 바뀌었다가 손님들이 묵는 사랑방으로도 쓰였다.

열화당이란 당호(堂號)를 지은 할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1971년 출판사 열화당을 세운 이가 이기웅(75)씨다. 그는 책 만드는 일을 ‘영혼을 염(殮)한다’고 표현한다. 우리 기록문화유산을 올바르게 세우는 작업은 그만큼 엄중하고 장엄해야 한다는 비유다. 45년 출판업 외길을 걸어온 그가 오래 마음에 뒀던 꿈이 있다. 백범(白凡) 김구(1876~1949) 선생이 쓴 자서전이자 일종의 유서인 『백범일지』 정본(正本) 복간이다. 1947년 국민계몽용으로 나온 초판본은 소설가 춘원 이광수가 원본 전체를 윤문해 내용이 생략되거나 오독(誤讀) 또는 인명·지명 등의 착오가 많은 것으로 지적돼왔다. 이 저본을 바탕으로 지난 70년 가까이 80여 종의 판본이 간행되면서 원본이 크게 훼손돼 버린 것이다.

지난해 6월 『백범 일지』 육필 원고의 복간을 선포했던 이기웅 대표는 1년 여 만에 이 필생의 소원을 이루었다. 우리 말 뿌리, 글 뿌리를 복원하겠다는 뜻을 담아 세로짜기를 한 친필본 1·2권과 구술본, 현대어로 쉽게 풀어낸 한글본, 보물 제1245호로 지정된 원본 복각본, 자료화보집 5권으로 이뤄진 2015년 판이 오는 8월 15일 광복절에 나온다. 수백 년 지속가능한 집을 지었던 선조의 신념을 이어 수 천 년 ‘영혼의 집’을 짓는 출판업으로 뻗어나간 열화당의 정다운 이야기가 이제 백범의 육성으로 우리에게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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