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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추적] 항운노조 등 잇단 노조 비리…왜 곪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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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각 조당 근로자 4명에 놀고먹는 조장이 1명이다. 그러나 서슬 퍼런 조장의 눈치를 보느라 입도 한번 열지 못하고 울며 겨자먹기로 일을 했다."(부산항 컨테이너 부두 노무자)

"항운노조가 민주화되려면 노무공급권 등 음성적인 자금줄을 없애야 하고 조합에 가입하지 않으면 채용하지 않는 클로즈드 숍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항운노조 조합원)

항운노조 비리 수사가 전국적으로 확대된 가운데 지난 9일 개설한 항운노조 민주화쟁취본부(www.nomuja.net) 사이트에는 조합원들의 분노 섞인 비난글이 쇄도하고 있다.

최근 기아자동차 광주공장의 채용비리에 이어 항운노조 비리사건 등이 터지면서 노동계가 위기를 맞았다. 모두가 조합 내부의 부패에서 비롯된 것이다. 정치권과 노동계에서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노조의 투명성을 높이기 위한 제도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노조가 과도한 힘을 가지면서 생긴 내부 부패로 노동운동이 위기에 빠지기는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은 노조의 부패를 차단하기 위한 강력한 법을 만들었고 이후 노동운동은 쇠락의 길을 걸었다.

◆부패로 쇠락한 미국 노동운동=1953년 미국 샌프란시스코항의 부두는 무법천지나 다름없었다. 이곳에 있는 서부항만노조는 폭력조직과 결탁, 부두의 노무자 공급을 독점하며 각종 비리와 폭력을 저질렀다. 말론 브랜도가 주연한 영화 '온 더 워터프론트'는 배경은 뉴욕이지만 당시의 부두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영화에서 항만노조는 부두를 폭력으로 장악한 뒤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노조 지도부에 잘 보인 사람이나 뇌물을 준 노무자들은 일감을 쉽게 받지만 나머지 노동자들은 허탕을 쳐야 한다. 노조의 비리를 비난할 경우 일감을 아예 받지 못하거나 심지어 매 맞아 죽기도 한다.

실제로 당시 서부항만노조는 각종 비리와 폭력 혐의로 상원의 조사를 받았다.

57년엔 미국 트럭운수노조의 비리 사건이 터졌다. 노조가 마피아의 폭력을 동원하는 대가로 조합자금을 제공하고, 돈세탁을 도와준 혐의가 드러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기존 집행부를 몰아내고 조합을 장악한 지미 호파는 나중에 조합공금을 횡령한 혐의로 기소된다. 호파는 트럭운수노조를 조합원 200만 명의 거대 노조로 키운 전설적인 인물이지만 75년 의문의 실종을 당한다. 당시 트럭운수노조의 비리는 잭 니컬슨 주연의 영화 '호파'에 사실적으로 묘사돼 있다.

당시 미국의 노동계는 35년 제정된 와그너법(단결권.단체교섭권.단체행동권 등 노동 3권 보장)에 따라 사용자와 비교적 대등한 교섭권을 갖고 있었다. 이후 자본가들의 요구에 따라 클로즈드 숍 제도의 폐지 등 노조의 권한을 제한하는 태프트-하틀리법(47년)을 제정했지만 비대해진 노동조합의 부패를 막지 못했다.

결국 항만노조와 트럭운수노조의 부정사건 이후 미 의회는 59년 노조의 재정회계를 감시하는 랜드럼-그리핀법을 제정했다. 이 법은 노조의 재정과 회계처리, 노조와 사용자 간의 자금 이동을 의무적으로 노동부에 보고토록 하는 것이 골자다.

동아대 강신준(경제학) 교수는 "50년대 미국 노조의 분열과 부패로 강력한 노조 규제법이 생겼고 이는 미국 노동운동의 쇠퇴를 가져왔다"며 "지금 우리 노동운동의 위기가 미국 노동운동의 비극과 너무나 비슷한 것 같아 우려된다"고 말했다.

◆노조 투명성 높여야=국내 기업의 노조는 회계.재정 투명성에 대한 견제를 받지 않는다. 97년 이전에는 노동부가 노조에 회계자료 제출을 요구하고 재정상태를 조사할 수 있는 조항이 노동법에 명시돼 있었다. 그러나 권위주의 정권 시절 노조를 탄압하는 수단으로 악용됐다는 비난을 받은 끝에 97년 노동법 개정 때 '행정관청이 노조에 필요하면 회계자료를 요청할 수 있다'는 상징적 조항으로 바뀌었다.

의무사항이 아니므로 노조가 소송에 걸리는 등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실제 자료를 요구한 사례도 거의 없다. 일부 대기업 노조의 경우 외부 회계법인에 감사를 맡겨 이를 공개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노조는 대의원 등 내부자에게만 회계자료를 공개하고 있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도 미국처럼 노조의 투명성을 높이는 쪽으로 제도를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노동계 관계자는 "노조가 변신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한국 노동계는 타의에 의해 강제로 변할 수밖에 없는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노사정위원회 김원배 상임위원은 "정부가 직접 노조의 운영상황을 감시하는 것보다는 일정 규모 이상의 노조는 외부기관에서 회계감사를 받도록 의무화하거나 필요한 경우 상급단체에 산하노조의 재정운영을 감독할 수 있는 감사권을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영국은 미국과 마찬가지로 노조가 회계기록을 매년 노동부에 제출한다. 그러나 일본이나 독일.프랑스 등 대부분의 유럽국가는 회계.재정 보고 의무가 없다.

한편 항운노조의 개편 논의도 본격화하고 있다. 열린우리당 이목희 제5정조위원장은 "부산 항운노조 채용비리는 독점적 노무 공급권이 원인"이라며 "노조의 노무공급권을 박탈해 일정 규모 이상의 항만과 하역회사가 직접 부두노동자를 고용하는 상시 고용 체계로 전환돼야 한다"고 밝혔다.

정철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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