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 그 작품에는 왜 제목이 없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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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라는 제목의 작품만을 모은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사진은 화가 김홍주(70)의 작품. ‘무제’(1985)라는 제목을 붙인 이유를 “그냥 보이는 대로 보시도록”이라고 설명했다.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무엇을 그린 걸까’, 알쏭달쏭한 작품 앞에서 허리 굽혀 명제표를 본 당신, ‘무제’라는 제목에 실망한 나머지 분노마저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제목 없는 추상 작품은 미술을 어렵게 만드는 ‘원흉’ 중 하나다. 그런데 이런 작품이 꽤 많다는 게 문제다.

국립현대미술관 7400여 소장품 중 ‘무제’라는 제목의 작품은 7%가 넘는 520여 점이다. 여기에 단순 일련번호나 ‘작품’ 같은 제목까지 포함하면 10%가 넘는다. 소장품 열 점 중 한 점은 ‘내용 있는’ 제목을 갖지 못한 셈이다. 시기적으로는 1960년대 것이 5.7%, 70년대가 5%였으며, 80년대가 8.1%로 가장 많았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서 29일까지 열리는 소장품 특별전의 제목은 ‘무제’, 전시에도 출품작에도 제목이 없다. 오해 마시라, 무제의 비밀을 풀어보겠다는 친절한 전시다. 제목 없는 작품 48점을 전시하고, 왜 ‘무제’라고 했는지 작가들에게 물었다.

전시장 곳곳의 벽면에 견출지를 붙이는 이벤트도 벌였다. ‘나라면 이렇게 했을 것’, 관객들이 이름을 붙여 줬다. 철도 침목을 잇대 만든 정현(59)의 대형 설치에는 ‘마지막 요새’ ‘뭉치면 하나’ ‘어디서 구했는지 알려들지 말라’ 등의 제목이 붙었다. 문신(1923∼95)의 좌우대칭 조각엔 ‘생명의 근원’ ‘연인’ ‘엉덩이’ 등의 아이디어가 백출했다.

 작가들은 자기 작품에 왜 이름을 붙이지 않았을까. 조각가 엄태정(77)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아서”라고 했고, 화가 김용익(68)은 “아직까지 적당한 제목이 떠오르지 않아서, 어떤 내용도 표상하지 않은 채로 작품이 스스로 존재하도록”이라고 했다. 또 김창열(86)은 “당시의 멋이었다. 그 세대 딴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하면서도 뭔가 울림이 있을 것 같은 그런 제목들이 유행했다”고 털어놓았다.

엄혹했던 시절 무제는 저항의 표현으로도 통했다고 한다. 화가 이반(75)은 “‘비무장지대’ 같은 제목을 붙이면 안기부(지금의 국가정보원)에 끌려가던 시절이었다. 제목을 붙이지 않는 것도 저항의 일환이었다”고 밝혔다.

 전시를 기획한 임대근 학예연구사는 “제목의 필요성은 주제와 소재가 다양해진 근대 들어 강화됐다. 전통적 성상화를 그리던 시절에는 생기지 않던 궁금증이다. ‘무제’라는 제목에 현대미술의 현학적 태도, 대중과의 소통 거부에 대한 반감이 쏟아지기도 하지만, 제목 없는 작품은 작가와 관객 간 대화의 시작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권근영 기자 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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