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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으로 간 공자 철학, 기독교의 神을 실직자로 만들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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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6호 08면

황태연 동국대 교수(왼쪽)와 김종록 작가가 15일 중앙일보사에서 공자철학이 유럽 사상에 미친 영향에 대해 토론하고 있다. 최정동 기자

공자가 기독교의 신(神)을 실직자로 만들었다.
 17~18세기 유럽 사상사에서 공자철학의 족적을 탐사해 온 황태연(60) 동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의 진단이다. 종교에 속박돼 있던 유럽인들에게 인본주의를 일깨우고, 신의 계율 없이도 윤리도덕을 준수할 수 있어야 한다는 관념을 불러일으킨 인본주의가 곧 아시아에서 건너간 공자철학의 영향이라는 것이다.
 이 같은 공자철학의 사상사적 의미를 지닌 책이 지난 5월 출간된 『공자, 잠든 유럽을 깨우다』(김영사)다. 정치철학자이자 동서양철학을 하나로 꿰는 황 교수가 김종록(52·문화국가연구소장) 작가와 함께 썼다. 대만에서 중국어판이 곧 출간될 예정이다. 김종록이 묻고 황태연이 답하는 방식으로 공자철학의 의미를 짚어본다.

‘유럽 속 공자’ 탐사한 황태연 교수와 김종록 작가

공자의 초상화.

계몽주의에 영향 미친 공자 사상
▶김종록=책을 기획한 동기는 근대화 시기에 비롯된 서구 콤플렉스를 떨쳐내고 문화 선도자 전략을 세우자는 뜻에서였다. 당초 책 제목을 ‘신들린 유럽’으로 하려다 ‘잠든 유럽’으로 순화시켰다. ‘신에 포섭된 유럽’이라는 표현이 책에 나온다.
 ▶황태연=동아시아에서 종교적 억압 때문에 사상 탄압을 한 것은 진시황 때가 대표적이다. 반면 서양은 진시황의 형태를 1000년 이상 계속했다. 기독교 교리에 어긋난 책이나 작품은 불태웠고 마녀사냥을 계속했다. 마법에 걸린 대륙이었으니 ‘신들린 유럽’이라고 하는 말이 개념적으로 더 정확하다. 근대화는 신들린 유럽이 마법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막스 베버는 탈마법화와 세속화로 표현했다. 근대화와 세속화는 같이 가는데 유럽에서 세속화의 철학적 동력이 공자철학이었다. 공자철학을 발견하기 전에는 도덕이든 뭐든 하느님의 계시나 명령으로 된다고 생각했다. 신이라는 관념 없이 인간 본성에서 도덕 감정이 생겨나는 것이고, 잘 수련하고 훈련하면 도덕적인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공자 사상을 그 전에 유럽에서는 접할 수 없었다. 공자 사상이 유럽에 들어가 신을 실직자로 만들고 새로운 문화체계를 만드는 과정이 계몽주의다.
 ▶김=동아시아는 처음부터 신에 구속되지 않았나.
 ▶황=공자는 기본적으로 사람 중심의 현세주의자다. 귀신을 어떻게 섬겨야 하느냐고 제자가 묻자 공자는 “산 사람을 섬기는 도리도 못하면서 어찌 죽은 귀신을 섬긴다고 하겠는가”고 대답했다. 그런 현세주의 철학이 유럽에 전파됐다. 공자철학에서 신과 하늘은 주변으로 밀려나 있었다. 반면 유럽에서는 신이 밥 먹을 때를 포함해 생활의 중심에 들어와 온갖 방식으로 사람을 구속해 왔다.

淸 관리, 관용 모르는 서양 선교사 질타
▶김=볼테르의 『관용론』 19장을 보면 청나라 강희제 때 중국 광둥(廣東)에서 교파가 다른 세 서양 선교사들의 격렬한 논쟁을 소개하고 있다. 논쟁을 중재하던 중국 관리가 “만약 우리 중국인들이 여러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기를 바란다면 먼저 여러분 자신이 상대방의 의견부터 용인하라”고 타일렀다.
 ▶황=당시 유럽 선교사들이 2000년 넘는 중국의 종교철학을 이용만 했기 때문이다. 자기의 믿음을 충실히 하는 것이 먼저였고, 다른 사람의 믿음은 이단이자 가짜라고 공격했다. 중국은 2000년 이상 종교·학문·철학·사상의 자유를 누리며 살아 왔기 때문에 이들 선교사의 싸움이 중국인의 눈에는 무당싸움처럼 보였던 것이다.
 ▶김=그러다 보니 철학자 라이프니츠는 “유럽에서 기독교 선교사를 중국에 파견할 게 아니라 중국에서 공자 선교사를 유럽에 파견하자”고 말했던 것인가.
 ▶황=볼테르도 “도덕적인 중국 같은 훌륭한 나라에 유럽 선교사가 가서 뭘 가르칠 게 있느냐”고 반문했다.

탈종교화·세속화에 역행한 조선 개화파
▶김=결국 유럽은 신의 세속화와 탈종교화를 통해 근대화됐다. 그런데 우리의 근대는 오히려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 촉발되고 개신교를 믿어야 근대화되는 것처럼 여겨졌다. 개화파의 상당수가 기독교인이었다. 공자철학의 나라에서 벌어진 희한한 일 아닌가.
 ▶황=김옥균·박영효·서재필·윤치호는 기독교를 믿지 않고는 개화와 근대화가 불가능하다고 믿었고, 조선 전체를 기독교화하려고 했다. 사실 서양의 근대화는 탈종교화·세속화됨으로써 신들린 상태에서 깨어나 근대화가 진행됐다. 당시 기독교 선교사들은 유럽 본토에서 설 자리가 없어 동아시아로 떠밀려 넘어온 것인데 개화파라는 사람들이 외형적 국면만 보고 서양의 모든 지식인들이 기독교를 믿고 있다고 생각한 것은 오판이고 착오였다. 사실 그런 식으로 우리나라를 종교화·기독교화하는 것을 근대화라고 믿었다면 그들은 반(反)근대주의자라고 봐야 한다. 근대화는 세속화이고 종교에서 이탈하는 것인데 엄밀한 철학적 의미에서 보면 개화파란 사람들은 사실 반개화파였던 셈이다. 근대화는 근대적인 국민국가와 민족국가를 수립하는 것인데 개화파들은 서구와 일본만 칭찬하고 우리 민족과 국가를 비난했다. 이들은 민족국가 수립에 반대되는 글을 발표했다. 위정척사파만 반근대론자였던 게 아니라 개화당파들도 사실은 종교와 국가라는 두 가지 핵심 문제에서 보면 반개화파이자 반근대주의자였다.
 ▶김=기존 저술에서는 못 봤던 관점인데.
 ▶황=우리나라는 당시 종교로부터 많이 벗어나 있었는데 개화파는 서구와 같은 탈종교화 수준에서 출발하지 않고 오히려 근대화되기 전의 유럽과 같은 상태로 돌아가려고 했던 셈이다.

이성이 감성을 대체하면 인간 억압체제
▶김=공자철학 이전 유럽에서 경험주의가 득세할 때는 평화스러웠는데, 합리주의가 득세하면 재앙을 초래하기도 했다.
 ▶황=합리주의는 결과적으로 나쁜 게 아니라 처음부터 나쁘다. 인간은 감성과 이성이 반반이 아니라 대부분의 인간은 감성이다. 감각과 감정의 능력을 감성이라고 부른다. 감성의 보조재나 보강재로 보면 이성은 좋은 거다. 그런데 인간은 80~90%가 감성적 존재인데 이성이 감성을 대체할 때 합리주의는 감성을 억압하게 된다. 감성을 합리주의로 대체해 그것으로 사회체제와 정치체제를 만들면 사람은 어떻게 되겠나. 공산주의나 히틀러의 나치즘도 합리주의의 산물인데 이것들이 인간을 억압하고 인권을 침해했다.
 ▶김=라이프니츠가 “공자 선교사를 유럽에 파견하자”고 했는데 중국 공산당 정부가 세계 곳곳에 공자학원을 설치하고 있다. 동아시아에서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책이 나올 정도로 폐기처분 위기에 몰렸던 공자철학인데, 왜 우리 시대에 다시 공자인가.
 ▶황=공자철학 경전에 있는 형태로 미래의 대안이 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공자철학을 더 발전시키고 성리학적 왜곡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 미래를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많은, 새로운 발견·발명·실험적 결과를 바탕으로 발전시킨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공자의 관용·인(仁)·공감 중심의 새로운 철학이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김=패치워크(Patch work·천 조각을 서로 꿰매 붙임) 문명론을 제시했는데.
 ▶황=서로 배우자는 것이다. 극동(동아시아)과 극서(유럽)는 시차가 있어도 끊임없이 서로 협력하고 모방하고 돕는 관계가 바람직하다. 상대의 문명이 높으면 공감하고 선망하고 모방하고 자기도 불완전한 점을 메워 높은 차원으로 발전하자는 것이다. 동아시아의 열등의식도 극복하고 서양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도 극복하자는 것이다. 극동과 극서는 서로 주고받되 충돌하지 않는다.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은 문명의 본질을 권력으로 착각한 것이다.
 ▶김=극동의 공자철학과 극서의 기독교가 패치워크할 수 있나.
 ▶황=기독교인과 공자가 가는 길은 사랑으로 통한다. 동일한 산을 오르면서 내가 가는 길로만 가야 정상에 오른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빼면 기독교와 공자철학이 갈등할 이유는 없다. 다만 기독교인들 중에도 도그마에 빠진 사람들은 ‘기독교성리학자들’이다. 내 길만 가야 정상으로 간다고 주장하는 것은 문제다.

동아시아 가치는 유럽서도 인정
▶김=중국에서 공자철학은 사회주의의 대체재인가 보완재인가.
 ▶황=현재의 중국 공산당이 마르크스·레닌주의와 공맹철학 중에 어느 것을 더 중시하는지 보자. 중국 문건에 나타나는 내용을 보면 마르크스·레닌주의는 거의 폐기한 것 같다. 덩샤오핑(鄧小平) 이후 중국 공산당이 제시한 발전 목표들인 온포(溫飽)·소강(小康)·대동(大同) 사회는 모두 공자철학의 개념이다. 명칭만 공산당이지 언술체계와 역사의식은 공맹철학으로 바뀌었다.
 ▶김=유럽이 높게 평가한 동아시아의 전통과 가치를 아시아인들은 오히려 평가절하한다.
 ▶황=지금까지는 서양이 더 발전돼 동양이 배우는 과정에서 스스로를 성찰할 기회가 없었다. 유럽이 동양의 것을 배워 다시 동아시아에 가져오니 우리가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공자의 민본주의를 프리드리히와 볼테르가 받아 다시 동아시아로 들여온 것이다. 서구의 많은 철학 테제가 공자철학에서 나온 것이다. 예컨대 ‘정직이 최선책’이라는 것도 공자의 정자정야(政者正也)를 번역한 것이다. 유럽이 우리에게서 배워간 것을 우리는 열등의식에 빠져 모르고 있었다.

장세정 기자 zh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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