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조선 첫 다다이스트 ‘고따따’는 누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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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경성의 다다, 동경의 다다
요시카와 나기 지음
이마, 296쪽, 1만4000원

“나는 한 개의 선언을 쓴다. 그리고 나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아니한다. 그러나 나는 어떤 소리를 한다. 그리고 나의 주의 상으로 선언이란 것에 반대이다. 그리고 주의에도 반대이다.”

 루마니아 출신의 프랑스 시인 트리스탕 차라의 이 선언 아닌 선언이 다다(dada)의 시작이었다. 전 세계적으로 다다는 1차 세계대전 이후 반짝 유행했다. 전쟁이 가져온 황폐함에 넌덜머리가 난 사람들이 기성의 권위와 형식을 거부하는 예술운동을 펼쳤다. 근대 문명에 반기를 드는 다다의 감염경로는 넓고, 속도는 빨랐다. 스위스 취리히에서 출발해 독일·스페인을 거쳐 미국 뉴욕에 도착한 다다는 마르셀 뒤샹의 그 유명한 변기 ‘샘’을 탄생시켰다.

사진 왼쪽이 20대 후반 무렵의 고한용. 오른쪽은 일본 신문에 연재한 무전 도보 여행기를 읽고 경성을 찾아온 독자로 추정된다. [사진 고한용 유족]

 1920년대 일제시대 경성에서도 다다에 감염된 사람이 있었다. ‘고따따’로 활동한 고한용(1903~1983)이다. 그는 1924년 『개벽』 9월호에 다다이즘을 소개한다. 그의 발자취를 추적한 저자는 일본의 한국 문학 연구자다. 저자는 일본 다다이스트의 연보를 보다 나온 몇 구절에서 고따따의 존재를 알게 됐다. ‘1924년 7월. 소설 『다다』 간행. 8월. 한국에 놀러갔다. 고한용을 알게 됐다(다카하시 신키치)’ ‘고한용이라는 조선 청년에게 초대를 받아 조선에 건너갔다. 경성에서 놀았다(쓰지 준)’ 등의 기록이다. 다카하시 신키치와 쓰지 준은 일본의 대표적인 다다이스트였다.

 고한용은 어떻게 다다를 접하게 됐을까. 그리고 일본의 다다이스트와 조선의 다다이스트는 어떻게 서로 알고서 초대하고 놀러가는 우정을 나눴을까. 책은 이런 호기심에서 출발했다. 저자는 3·1 운동 이후 이들의 교류의 장이 열렸다고 봤다. 1919년 조선의 독립운동으로 조선총독부는 무단정치를 접고 문화정치를 펼친다. 이 시기 조선의 청년들이 일본으로 유학을 많이 갔다. 고따따도 그 중 하나였다. 그는 니혼대학 미학과(예술과)에서 공부했는데 당시 미학과는 조선의 문학 청년과 일본의 문학 청년들이 어우러지는 장이 됐다.

 경성의 다다이스트로써 고따따는 딱 2년간 활동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가 다다를 접하고, 다다를 말하고 다녔던 궤적에서 당시 경성을 읽을 수 있다.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고 곧 멸망할 것이고 그로 인해 영속할 것이라며 부정의 정신을 표방했던 다다가 20년대 경성과 일본의 공통 정서로 공유됐다는 점이 흥미롭다. 아무도 들춰보지 않았던 고한용의 사연을 저자는 가족들의 도움을 받아 태생부터 짚어가며 전방위로 펼쳐놨다.

한은화 기자 onhw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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