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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거운 주제, 유쾌한 몸짓 … 이탈리아서도 통한 ‘불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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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국립현대무용단의 ‘불쌍’이 지난달 26, 27일 이탈리아 현대예술 축제 ‘파브리카 유로파’ 초청으로 피렌체 골도니 극장에서 공연했다. 종교 상징물 ‘불상’을 장난감처럼 다룬 파격적인 시도에 관객들은 “독특하고 강렬하다”며 환호했다. [사진 파브리카 유로파]
공연이 끝난 뒤 골도니 극장 문을 나서는 피렌체 관객들. 오른쪽에 ‘불쌍’ 포스터가 붙어있다.

무대의 불이 꺼지자 갈채가 쏟아졌다. 14명의 무용수와 안무가의 커튼콜이 끝나고 무대의 불이 다시 꺼졌을 때도 박수와 환호는 멈추지 않았다. 350석을 꽉 채운 관객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브라비(Bravi)’를 외쳤다. 국립현대무용단 ‘불쌍’이 이탈리아 피렌체 무대에 처음으로 선 지난달 26일(현지시간) 밤. 피렌체 남쪽 피티 궁전 인근에 자리 잡은 골도니 극장은 문화의 충돌과 변형을 다룬 한국의 현대무용 작품에 환호했다.

 이날 공연은 이탈리아 최대 규모의 현대공연예술 축제 ‘파브리카 유로파(Fabbrica Europa)’의 초청으로 이뤄졌다. 르네상스의 도시 피렌체에서 ‘지금 이 시대의 예술’을 추구하며 1994년 시작된 파브리카 유로파는 22회째인 올해 처음으로 한국 작품을 선보였다. 조선시대 12잡가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이희문 컴퍼니의 ‘오더메이드 레퍼토리 잡’이 지난 5월 7, 8일 개막작으로 무대에 섰고, ‘불쌍’은 6월 26, 27일 공연했다. 96년부터 20년째 파브리카 유로파 예술감독을 맡고 있는 마우라치아 세템브리(62)는 “두 작품 모두 지난해 가을 서울아트마켓에서 처음 봤다. 처음엔 이상하게 보였는데, 계속 기억에 남아 마음을 울렸다”고 초청 이유를 밝혔다.

 ‘불쌍’은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의 문화 충돌과 변형을 불교의 상징 ‘불상’을 모티브 삼아 보여준다. 작품 제목 ‘불쌍’은 ‘불상’을 소리 나는 대로 표기한 것이다. 안무를 한 안애순(55) 국립현대무용단 예술감독의 설명에 따르면 “과거 거룩한 종교의 상징이었던 불상이 ‘부다 바(Buddha Bar)’ 등에서 인테리어 소품으로 소비되는 처지가 불쌍하고 애처롭다는 뜻”도 갖고 있다.

 공연은 형형색색의 불상들이 무용수와 어우러져 ‘노는’ 장면에서 시작됐다. 무용수들은 불상의 무릎을 베고 눕는가 하면, 인형처럼 안아 어르기도 하고, 뒤에서 껴안았다 심지어 입을 맞추기도 했다. 경건한 종교성부터 깨버리고 시작한 ‘불쌍’의 행보엔 거침이 없었다. 천장에 매달린 불상 아래에서 난장판 춤을 추고, 알록달록 플라스틱 바구니를 던졌다 쌓았다 무너뜨렸다 하면서 끊임없이 변하는 문화와 가치관, 그리고 인간 삶의 속성을 보여줬다. 또 설치미술가 최정화의 독특한 무대미술과 DJ 소울스케이프의 강렬한 음악은 ‘불쌍’을 ‘융합예술’의 경지로 확장시켰다.

 26일 공연을 본 이탈리아 춤평론가 주세페 디스테파노(57)는 “한국의 현대무용 수준에 감탄했다”며 “전통과 현대가 뒤섞인 우리 일상의 모습을 강렬한 이미지로 보여줬다”고 평했다. 회사원 키아라 풀젠티니(34)는 “강한 리듬의 음악이 가슴을 쿵쿵 울렸다. 무용수들의 기량이 뛰어나고 볼거리가 많아 흥미로웠다”고 했다. 또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섬의 메시나 극장에서 해외프로그램 책임자로 일하는 코라도 로쏘(44)는 “우리 극장에도 초청하고 싶다”며 “종교의 아이콘에 알록달록 색을 입혀 팝아트로 활용한 것이 특히 인상적”이라고 했다. 안 감독은 “‘불쌍’은 빠른 근대화 과정에서 문화·가치관의 혼란을 경험한 우리의 상황을 다룬 매우 한국적인 작품인데, 이에 서구 관객들이 공감하고 적극적으로 호응해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국립현대무용단은 1일 이탈리아 안코나 ‘인테아트로 페스티벌’ 초청 공연에 이어 오는 8월 독일 베를린의 국제무용축제 ‘탄츠 임 아우구스트’에서도 ‘불쌍’을 공연할 예정이다.

피렌체(이탈리아)=이지영 기자

jy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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