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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역사] 6만 입양아 보살핀 조병국 홀트 부속의원 전 원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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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아기들의 주치의 … 정년 퇴임하고도 22년간 청진기 놓지 못해

“지수야. 오늘 기분이 어때?” 조병국 원장이 홀트일산복지타운 ‘사랑의 집’에서 공뇌증(선천적 뇌 발육장애)을 앓고 있는 김지수양(2)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조원장은 김양을 비롯해 홀트일산복지타운에서 지내는 250명 장애인들에게 엄마이자 할머니이자 의사다.

60년대 시립아동병원에선 매일 아이들이 죽어갔어요
하루에 사망진단서 10장 넘게 쓴 적도… 무능력함에 화가 났죠
포기하는 대신 부모 찾아주기로 결심, 홀트복지회와 인연

브란젤리나(브래드 피트, 앤젤리나 졸리) 커플, 차인표·신애라 부부, 가수 조영남, 배우 이아현의 공통점은 뭘까. 가슴으로 낳은 아이를 키우고 있다는 거다. 세상에 부모 없이 태어난 사람은 없지만, 모든 아이가 친부모 밑에서 자라는 건 아니다. 특히 먹고 살기 어려웠던 1960년대에는 부모에게 버림받는 아이들이 많았다.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이 된 이젠 먹고 살 걱정 하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6·25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그땐 입에 풀칠하기 힘든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자녀의 탄생마저 누군가에게는 축복이 아닌 재앙이었다. 엄마 젖도 물어보지 못한 채 길거리에 버려지는 아이들이 부지기수였다. 의료시설마저 열악해 병이나 장애가 있는 아이들은 물론, 건강하게 태어난 아이들도 전염병 등으로 세상을 떠났다. 병들고 버려진 아이들을 치료하고 좋은 부모를 찾아주는 데 일생을 바친 사람이 있다. 조병국 홀트아동복지회 부속의원 전 원장이다. 그의 손을 거쳐 간 아이들이 6만 명이 넘는다. 올해 나이 82세. 정년 퇴임한 지 22년이 지났지만 할머니 의사는 아직도 청진기를 놓지 못하고 있다.

 조병국 원장은 1993년 60세에 홀트아동복지회 부속의원에서 정년퇴직했지만, 후임자가 나타나지 않아 15년을 넘게 더 일했다. 어깨가 마비돼 더는 진료를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완전히 그만둔 게 2009년. 하지만 지난달 8일 조 원장을 만나기 위해 찾은 곳은 여전히 홀트일산복지타운이었다.

 은퇴 후에도 그는 이곳에서 말리 홀트와 함께 생활하고 있다. 말리 홀트는 홀트아동복지회를 설립한 해리 홀트의 셋째 딸로 현재 홀트아동복지회 이사장이다. 복지타운 내 아담한 2층집 ‘말리 하우스’가 현재 조 원장이 머무는 곳이다. 1층은 말리와 장애인 두 명이, 2층은 조 원장이 사용한다. 2층이라고 하지만 조 원장이 사용하는 곳은 6.6㎡(2평) 남짓한 방 두 칸이다. 하나는 사무실, 하나는 침실로 사용한다. 원래 게스트 하우스로 이용하는 곳이다. 어려운 시절 여자의 몸으로 의대까지 졸업해 평생을 고아를 위해 희생한 사람의 여생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단출했다. 딸이 사는 강남구 일원동 집은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만 간다.

 원래 퇴직 후에는 미국으로 이민 갈 계획이었다. 생각을 고쳐먹은 건 홀트에서 ‘다시 일해 줄 수 없겠느냐’고 전화가 와서다. 후임자가 박봉에 일이 많은 걸 알고는 두 달만에 그만둬 버린 거다. 2009년 어깨가 아파 청진기를 완전히 놓았을 때도 ‘홀트일산복지타운 일을 도와 달라’는 제안 때문에 이곳을 떠나지 못했다. 그렇게 하루하루 이어진 게 올해로 벌써 7년째다. “현재는 긴급할 때 진료를 보는 ‘스페어타이어’ 역할을 하고 있어요. 2012년 병원이 문을 닫았으니 본격적인 의료 행위를 하는 건 아니죠. 하지만 복지타운 사람들이 ‘닥터 조’가 있으면 마음이 편하다고 하니 못할 건 또 뭐예요. 말리 이사장을 돌볼 사람도 필요하고요.”

6·25 직후 “유아 사망률 낮추겠다” 의사의 길로

조 원장이 소아과 의사가 된 건 유년시절 기억 때문이다. 33년 평양에서 6녀 1남의 맏이로 태어난 그는 어린 나이에 두 동생의 죽음을 경험해야 했다. 요즘에는 그런 일이 거의 없지만 당시에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세상을 떠나는 애들이 부지기수였다. “한 명은 의문의 출혈로, 또 다른 한 명은 홍역과 폐렴이 겹쳐 하늘나라에 갔어요. 어린 나이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분했어요. 그때부터 저도 모르게 의사가 돼 아픈 애들을 치료하겠다고 마음먹었죠.”

 사실 당시에는 남녀차별이 심할 때라 여자를 공부시키는 집은 많지 않았다. 집안일이나 시키다가 시집 보내는 게 당연한 순서였다. 하지만 조 원장의 외할아버지는 남달랐다. 한문교사였던 그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가난한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 앞장섰고, 여자가 배워 한국 경제를 일으켜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그의 부모가 선교사의 도움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교편을 잡은 데도 할아버지 공이 컸다.

 별 어려움 없이 초·중학교를 졸업했지만 배화여고 2학년 때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학업을 이어가기 어려워졌다. 전쟁이 끝난 후 다시 찾은 서울은 폐허 그 자체였고, 아버지가 학생들을 모아 간이로 운영하는 훈육소에서 고등학교 과정을 겨우 마쳤다. 충청도로 피란 가는 길에서 사람들이 처참하게 죽어있는 모습을 본 그는 의사가 되겠다는 결심을 더욱 굳혔다.

 큰 꿈을 안고 서울여자의과대학(현 고려대 의과대)에 진학했지만, 학생과 교수의 갈등으로 도중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당시 학생들이 힘을 모아 교수를 퇴출하려는 작업이 진행 중이었는데, 선배들은 그에게 학생들 서명을 받아오라고 시켰고, 교수들은 그에게 주동자가 누군지 밝히라고 윽박질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몇 달을 학교에 안 나가갔어요. 부모님께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54년 세브란스의과대(현 연세대 의과대) 편입시험을 치렀죠.”

 당시 같은 의과대끼리는 편입이 안 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하늘이 도왔는지 면접시험 면접관으로 앉아 있는 교수가 그가 어릴 때 자주 찾아갔던 주치의였다. ‘다행이다’다 싶은 마음에 “합격시켜주면 유아 사망률을 낮추겠다”고 큰소리쳤고, 결국 합격해 연세대에서 의학 공부를 이어갈 수 있었다.

1978년 홀트아동복지회 부속병원에서 아이를 진찰하고 있는 조병국 원장.

“수용소 같은 병원, 기저귀 채울 고무줄도 없었죠”

58년 학교를 졸업하고 62년 소아과 전문의로 서울시립아동병원(현 서울특별시 어린이병원)에서 일을 시작했다. “당시 소아과 과장 1명이 봐야 할 아동이 100명이 넘었어요. 의료시설은 열악한 정도가 아니라 최악이었죠. 아직도 발령받은 첫날 기억이 또렷하게 기억나요.”

 병실 문을 연 그를 반겨준 건 해맑게 웃는 아이의 모습도, 깨끗한 환경에서 치료받는 아이들도 아니었다. 코끝을 찌르는 지린내였다. 병실 가운에 있는 연탄난로에서는 가스 냄새가 났고, 창가로 이어진 연통에 기저귀가 널려 있었다. 세탁시설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으니 기저귀가 깨끗할 리가 없었다. 병원이 아니라 수용소에 가까웠다. 미숙한 신생아를 키울 인큐베이터는커녕 X선 촬영 기계마저 낡아 오진하기 일쑤였다.

60년대 시립아동병원 병상 수는 80개에 불과했는데, 몇 년 후 입원 환자 수는 연간 2000명으로 늘었고, 72년에는 2300명에 이르렀다. “기저귀 감이 부족해 거의 모든 아이가 극심한 기저귀 발진에 시달렸어요. 기저귀를 채울 고무줄이 없어서 한 번 사용한 링거 줄을 잘라 쓰기도 했죠. 한 침대에 두세 명이 함께 누워있는 건 다반사였고, 워낙 일손이 부족해 아이들을 일일이 안고 우유를 줄 여유가 없어서 영양실조에 걸리는 애들도 많았죠.”

 당시 버려지는 아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곳은 서울시립아동병원과 서울시립아동보호소뿐이었다. 5세 미만 아동은 시립아동병원, 5~17세 부랑아는 시립아동보호소에 보내졌다. 시립아동병원뿐 아니라 시립아동보호소도 상황이 열악하기는 매한가지였다. 74년 1410명을 수용하고 있지만 보모는 20명밖에 안됐고, 기숙사 1동에 70~80명이 모여 있어 피부병·안질 등 질병이 끊이지 않았다. “어른의 잘못으로 불행한 출생을 경험한 아이들이 불행하게 죽어갔어요. 하루에 사망진단서를 10번 넘게 써야 할 때도 있었죠. 어린애들을 살려보겠다고 이 길에 들어섰는데 저 자신의 무능력함에 화가 나더군요. 그만둘까 고민도 여러 번 했습니다.”

 그는 아이들을 살릴 방법을 고민했다. 병원에서 부모 사랑도 못 받고 죽느니 차라리 좋은 곳에 입양을 갈 수 있으면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때부터 입양기관에 적극적으로 연락을 취했고, 가장 활발하게 아이 입양에 나서는 곳이 홀트아동복지회였다.

미국 입양된 뇌성마비 아이, 재활의학 전문가가 돼 찾아와

76년에는 아예 홀트아동복지회 부속의원으로 자리를 옮겨 아이들을 진료하고 좋은 부모를 만나게 해주는데 힘썼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 억울한 일이 생겼다. 88년 서울올림픽이 개최되면서 국내 언론으로부터 ‘아동 수출국 1위’라는 거센 비난을 받게 된 거다. “저는 예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집 없고 병든 아이들에게 따뜻한 집과 적절한 보살핌을 줄 부모를 찾아주고 싶을 뿐이에요. 해리 홀트의 말처럼 모든 아이는 행복한 가정을 가질 권리가 있어요. 국내 입양이 불가능하다면 해외라도 좋은 부모 밑에서 행복하게 자랄 기회를 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89년에는 세계 1위 고아 수출국이라는 오명을 씻기 위해 ‘해외입양전면금지령’이 내려졌지만 국내 입양 수요가 적어 문제가 생기자 다시 철회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또 스웨덴에 입양돼 학대를 받고 자란 아이의 실화를 다룬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이 91년 영화로 만들어지면서 해외 입양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는 더 커졌다. “그런 일을 겪으면서 저 자신도 혼란스러워졌어요.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믿음이 뿌리째 흔들렸죠.”

고아 수출국이란 말과 함께 해외입양 인식이 나빠졌어요
저도 혼란스러웠고, 옳은 일 한다는 믿음이 흔들리기도 했죠
하지만 한평생 헌신…‘봉사할 날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도

 이 모든 고난을 이겨낼 수 있었던 힘은 해외로 입양 간 아이들의 소식이었다. “미국으로 입양된 뇌성마비 아이는 재활의학 전문가가 돼 저를 찾아왔고, 엄마가 동반자살을 시도해 두 다리를 모두 잃은 아이는 의족 업체를 운영하는 미국인에게 입양돼 의족을 한 채 롤러스케이트 타는 사진을 보내왔어요.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하늘에 감사하고, 신에게 감사합니다.”

 버려지고 아픈 아이들을 돌보느라 정작 자신이 배 아파 낳은 애들에게는 소홀했던 게 아직도 미안하다. 1남 2녀 세 자녀는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가 번갈아 가며 돌봐줬다. 학교에서 공개수업을 하거나 학부모 모임 때 한 번도 제때 참여하지 못했다. 애들이 알아서 “엄마 참석 못 한다고 했다”고 할 정도였다. “지금도 그런 생각하면 늘 미안해요. 바르게 잘 자라줘 고마울 뿐이죠.” 하지만 아이들은 그를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았다. 주말이면 아이들을 데리고 병원에 가 버려진 아이들을 보여주며 “너희는 밤에 엄마·아빠와 함께 잘 수 있지만 이 아이들에게는 아무도 없다. 엄마가 돌봐야 한다”고 알려줬고, 양해를 구한 덕분이다.

“마지막 날까지 누군가의 손을 잡아주고 싶어요”

조병국 원장은 2012년 파라다이스상 사회복지 부문 수상자로 선정됐다.

지난 인생을 돌아보면 슬픈 일보다는 기쁜 일, 상처받은 일보다는 감사할 일이 더 많았다. 특히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많은 사람에게는 일일이 찾아다니며 인사를 하고 싶을 정도다. 기억에 남는 사람 중 하나가 가스톤 쿵이라는 스위스 사람이다. 다큐멘터리를 보고 한국을 도우려 자원봉사를 온 사람이었다. 서울시립아동병원의 참담함을 두 눈으로 확인한 그는 고국으로 돌아가 ‘닥터 조를 돕고 싶다’는 내용의 편지를 썼다. 처음에는 미심쩍어 두세 달간 답장도 안 했다. 나이도 어린 사람이 도대체 뭘 해줄 수 있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편지는 계속 왔고, 밑질 게 없다는 생각에 “입으로 우유를 못 먹는 미숙아들을 위해 코로 우유를 주입할 수 있는 호스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우유를 못 먹는 통에 미숙아들이 태어난 지 일주일이나 한 달 만에 죽어 나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답은 없었다. ‘혹시나’ 했던 기대는 ‘역시나’ 하는 실망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이후 73년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가스톤 쿵이 소속돼 있던 국제아동지원기구 TDH(Terre Des Hommes, 인간의 대지)에서 자동고압멸균소독기, 소독용증기발생기, 소독통, 자동만능세척기 등 당시 시가로 1700만원어치 의료기기를 서울시립아동병원에서 무상으로 기증한 거다. “가스톤 쿵뿐 아니에요. 미세스 맥아더, 미세스 매기, 룩셈부르크 할머니 등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아이들을 도와주라고 신이 보내 준 사람들이라는 생각밖에 안 들어요.”

 조 원장은 “누군가 내미는 따뜻한 손의 작은 온기가 세상살이의 큰 힘이 되고, 내 손에도 누군가를 데워줄 온기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눈과 귀, 두 다리가 멀쩡할 때까지 누군가의 손을 잡아줄 예정이다. 매일 밤 잠들기 전 그는 기도한다. “봉사할 수 있는 날을 하루만 더 주세요.” 그리고 아침에 눈을 뜨면 생각한다. “봉사할 날을 더 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전민희 기자 jeon.minhee@joongang.co.kr, 사진=김경록 기자 kimkr8486@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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