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취재일기

‘경력법관 자격’ 논란 못 막은 대법원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9면

전영선 기자 중앙일보 팀장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전영선
사회부문 기자

“평가 과정에서 공정성 논란을 피하기 위해 최종 면접 전까지 인적 사항을 완전히 가리는 ‘블라인드 테스트’ 방식으로 평가했다.”

 대법원은 다음달 1일 임용되는 첫 로스쿨 출신 경력법관 37명의 명단을 공개하면서 선발 과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출신·학벌·나이·지역 등을 보지 않고 실력만 봤다는 얘기였다. 그렇다면 뭐가 달라도 달라야 마땅하다. TV 예능 프로그램 ‘복면가왕’ 정도의 반전, 그러니까 실력은 있는데 저평가된 법조인이 판사로 임용되는 반전을 기대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아쉽게도 반전은 없었다. 오히려 사법시험 출신 판사 임용 때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유형의 논란들이 잇따라 불거지고 있다. 경력법관 37명은 이미 지난해 말 선발 통보를 받은 상태였지만 공식적인 명단 발표는 지난 11일에야 이뤄졌다. 임용 사실을 비밀에 부쳐 사회가 얻은 이득이 무엇인지는 분명치 않다. 대신 부작용은 예상 가능하다. 로펌은 곧 판사로 임용될 변호사와 유대를 쌓으면서 ‘후관(後官) 예우’를 할 기회를 잡았다.

 우려가 현실로 드러나기도 했다. 그동안 로클러크(재판연구원) 경력자가 법관 임용에 유리할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돼 왔다. 뚜껑을 열어보니 역시 경력법관 37명 중 27명(73%)이 로클러크 출신이었다. 법원이 눈을 가리고 평가했다는 법조인의 실력이란 게 결국 ‘재판 보조업무 실력’이었던 걸까.

 한 경력법관 임용 예정자는 로클러크 근무 당시의 문제로 구설에 휘말려 있다. 자신이 속해 있던 재판부의 사건을 변호사로 전직한 뒤 수임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대법원은 “해당 변호사는 당시 재판부 중 좌배석 판사의 재판연구원이었다”며 “문제의 사건은 우배석 판사의 사건이었기 때문에 관여하지 않은 것으로 봐야 한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좌배석이든, 우배석이든 같은 재판부 사건이었음은 틀림없는 것 아닌가. 서울변호사회는 성명을 내고 “법관이 되겠다는 변호사들이 기본적 양식조차 갖추지 못한 채 변호사 업무를 수행했다”며 “의혹을 명백히 밝히고 사실일 경우 임용 내정을 취소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대법원이 판사 임용 방식을 바꾼 것은 기존 법관제도에 문제가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특정 학교 출신 편중, 현장 경험 없는 판사들의 기계적 법 적용, 법원 순혈주의를 깨고 현장 경험이 풍부한 법조인을 임용해 보다 나은 법률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것이었다. 과연 그 취지에 맞는 선발이었는지 되돌아봐야 한다. 지금이라도 평가기준 등 법관 임용 과정을 투명하게 밝혀야 한다.

 이미 지적되고 예견됐던 문제들이 현실화되는 것을 보면서 국민은 실망하고 있다. 사법의 정의는 판사 임용에서부터 시작돼야 한다.

전영선 사회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