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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공짜’가 없듯이 ‘그냥’도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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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김환영
김환영 기자 중앙일보 실장
김환영
논설위원

엄마가 묻는다. “내일이 시험인데 왜 게임만 하고 있니.”

 자식이 대답한다. “그냥.”

 아내가 묻는다. “오늘은 왜 또 술 마셨어요.”

 남편이 답한다. “그냥.”

 내 배 아파 낳은 자식이지만, 또 사랑하는 남편이지만, ‘그냥’은 복통 터지고 억장이 무너지는 대답일 것이다. 또 ‘그냥’은 답으로서 전혀 자격이 없다. ‘그냥’이라는 것은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차라리 ‘공부하기 싫어요’ ‘주신(酒神)이 나를 불러서’라고 답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공짜도 없다. 한 설화에 따르면 ‘세상에 공짜라는 것은 없다’는 세상의 모든 지혜를 한마디로 압축한 말이다. 또 ‘공짜 없음’은 경제학의 핵심 규칙 중 하나다. 그런데 ‘그냥은 없다’는 ‘공짜는 없다’보다 더 크고 포괄적인 말이다. ‘그냥’은 ‘아무런 대가나 조건 또는 의미 따위가 없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유가 없는 게 있을까. ‘핑계 없는 무덤은 없다’ ‘처녀가 애를 배도 할 말이 있다’고 했다.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냥’이라는 게 있다면 경제학이건 물리학이건 과학이 성립할 수 없다.

 하지만 세상에는 미스터리도 많다. 이유를 살피기 힘든 경우도 있다. 예컨대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바울이 서쪽으로 간 까닭은’ 같은 질문은 이유를 찾아내기 힘들다.

 그리스도교와 불교는 모두 사방팔방 전 세계로 전도사들을 파견했다. 그리스도교 포교를 위해 예수의 제자들이 동양으로 떠났다. 부처의 제자들 또한 최소한 이집트·그리스까지 갔다. 그러나 불교와 그리스도교는 한때 각기 세계의 동쪽·서쪽뿐만 아니라 서쪽과 동쪽에서도 흥하다 결국엔 쇠퇴의 길을 걸었다.

 왜일까. 역사적·사회과학적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종교 또한 달마는 동쪽, 바울은 서쪽으로 간 이유, 전근대 세계에서 그리스도교는 서쪽, 불교는 동쪽에서 흥한 이유에 대해 답을 낸다. 모든 게 다 ‘섭리’와 ‘업보’ 때문이다. 종교는 우리가 그 이유를 모를 뿐 반드시 어떤 이유가 있다는 것을 가르친다.

 이처럼 과학도 종교도 우리에게 ‘그냥’은 없다는 것을 가르친다. 하지만 이유 찾기는 고통스러울 때가 있다. ‘공짜’라는 게, 또 ‘그냥’이라는 게 정말 있다면 얼마나 살기 편할까. 예컨대 복지를 무한대로 확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사고(事故)는 그저 사고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누구를 탓할 일도 벌줄 일도 매뉴얼을 만들 필요도 없다. 하지만 사고는 ‘뜻밖에 일어난 불행한 일’일 뿐만 아니라 ‘어떤 일이 일어난 까닭’이기도 하다. 사고 또한 까닭을 묻는다. 사고마저도 ‘그냥’이라는 게 존재한다는 것을 입증하지 않는다.

 에드워드 핼릿 카(1892~1982)의 틀 안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대화를 한다고 하더라도 까닭을 찾지 않는 대화는 무의미하다. 역사를 잊으면 역사를 반복하게 된다고도 말한다. 역사는 ‘그냥’ 일어나는 게 아니다. 역사를 잊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까닭을 기억하는 것이다.

 조금 멀리로는 임진왜란도 국권상실도 한국전쟁도, 가깝기로는 연평도도 천안함도 세월호도 메르스도 우리에게 까닭을 엄중히 묻는 역사적 사건들이다. 이유를 자꾸 따지면 ‘피곤한 사람’ ‘이상한 사람’이라는 낙인이 찍히기 쉽다. 정당 정치에서도 마찬가지다. 선거 패배의 원인을 따지다가 이내 피로현상이 엄습한다. 원인을 알아내 고치기보다는 ‘나는 살겠지’ 하는 기대에서 분열의 유혹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누군가는 ‘그냥이라는 것은 없다’며 집요하게 이유를 따져야 한다.

 ‘공짜’나 ‘그냥’이 강한 이유는 마술 같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광복 후 수십 년간은 산업화건 수출이건 민주화건 올림픽 메달 따기건 물론 역경도 있었지만 뭐든지 하면 마술처럼 척척 잘됐다. 지금은 아니다. ‘공짜’와 ‘그냥’에 기대는 마술적 사고에서 벗어나자. 통일 또한 ‘대박’일지 모르지만 철저한 준비 없이 ‘그냥’되는 것은 아니다.

김환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