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球와 함께한 60年] (46) 장훈 선수 <上>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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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내가 재일 야구인 장훈(63)을 처음 만난 것은 1970년 초 상업은행 감독이었던 장태영씨의 소개를 받아서였다. 장감독은 "일본 프로야구 도에이 플라이어스에서 뛰고 있는 장훈이 서울에 와 있는데 같이 만납시다"라며 연락을 해왔다.

그날 처음 만난 자리에서 장훈과 나는 뭔가 통하는 것을 느꼈고, 이후 두터운 친분을 유지하게 됐다. 벌써 30년이 훌쩍 넘었지만 그와 나는 요즘도 야구는 물론 세상사.개인사를 상의하며 지내고 있다. 최근에 그는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이 재미있다며 복사를 해 일본으로 보내달라고 전화를 걸어왔다.

장훈에 관해서는 지금까지 국내 각 언론에서 연재기사는 물론 만화.소설로도 다뤘다. '방망이는 알고 있다' '일본을 이긴 한국인' 등 그의 일대기가 단행본으로 출판되기도 했다.

장훈과 30년 이상 가까이 지내면서 느낀 점은 크게 두가지다. 하나는 그가 누구보다 강한 승부욕을 지녔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나는 한국사람이다'라는 민족의식이 투철하다는 것이다. 내가 그와의 만남을 통해 느낀 후배 야구인들이 본받아야 할 점과 에피소드 등을 세번에 걸쳐 소개하겠다.

장훈은 일본 프로야구에서 불멸의 기록을 남긴 최고의 스타다. 그는 재일동포 2세로 히로시마에서 태어나 네살 때 화재로 오른손 네번째 손가락에 중화상을 입었지만 그 장애를 이겨냈다.

또 다섯살 때는 원폭 피해를 당했고 여섯살 땐 아버지를 여의었으나 그 역경 역시 극복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에서 극심했던 한국인에 대한 차별을 이겨내고 일본 프로야구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좌절을 모르는 '불굴의 야구인'이라고 할 수 있다.

장훈은 재능도 타고났지만 남보다 두배, 세배의 노력으로 최고의 자리를 차지했다. 그는 59년 나니와상고를 졸업하고 도에이 플라이어스에 입단해 최우수 신인상을 받았으며 62년에는 리그 MVP를 차지했다. 모두 일곱번이나 수위타자에 올랐다. 그는 또 일본 프로야구 유일의 3천안타 기록 보유자(통산 3천85안타)다.

그는 자신의 승부욕에 대해 이렇게 얘기한 적이 있다.

"현역 시절 시즌 중에, 특히 여름에 경기를 끝내고 집에 돌아오면 녹초가 돼요. 경기 세시간 전부터 훈련한 뒤 경기를 마치고 집에 오면 오후 10시가 넘지요. 힘들어 쉬려고 하면 머릿속에 경쟁자들이 떠올라요. 주로 퍼시픽리그의 홈런.타격 경쟁자였던 노무라나 센트럴리그의 나가시마.오사다하루(王貞治) 등이죠. 순간적으로 '그들도 쉬고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고, 그러면 주저없이 방망이를 들고 다시 마당으로 나갔어요. 그리고 마음 속에는 그들의 얼굴을 떠올리고, 머릿속엔 상대 투수와의 대결 상황을 가정해 놓고 지쳐 쓰러질 때까지 스윙을 했어요. 또 한번 녹초가 돼 다시 목욕하고 잠자리에 들 때 '이러다가 내일 못 일어나면 어떡하나'라는 생각이 들곤 했어요. 매일 그렇게 온 힘을 다했지요. 그래야만 그들을 이길 수 있었으니까요."

이용일 前 한국 야구위원회 사무총장
정리=이태일 야구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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