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IS 남자친구를 소개합니다’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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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위크] 온라인에서 이슬람국가 전사와 거짓으로 사귀며 정보를 캐낸 프랑스 기자의 신간 ‘지하드 여전사가 되어’

안나 에렐(32·가명)은 지금 도망 중이다. 언제 끝날지 기약 없는 도망이다. 잡히면 아주 고통스런 방식으로 무참히 살해당할 것이다. 잡히지 않는다 해도 평생을 두려움에 떨며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녀의 책 ‘지하드 여전사가 되어’ 때문이다.

프랑스에서 프리랜서 기자로 일하던 에렐은 이슬람국가(IS)로 향하는 유럽 청소년들을 취재 중이었다. 취재를 위해 멜로디라는 가명으로 페이스북 계정을 만들고 IS 관련 기사나 동영상 링크를 가끔씩 게재했다. 어느날 에렐은 한 IS전사의 동영상을 페이스북에 링크했다. 사건은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그 동영상의 주인공 아부 빌렐로부터 페이스북 메시지가 온 것이다. 에렐은 무슬림으로 개종한 20세 프랑스 여성 멜로디를 가장해 빌렐과 연락을 주고받았다. ‘지하드 여전사가 되어’는 그 과정을 엮은 책이다.

이 책엔 멜로디와 빌렐의 대화 내용이나 IS가 젊은이를 유혹하는 수법이 구체적으로 담겼다. 빌렐은 멜로디를 꾀어내기 위해 온갖 달콤한 수사를 동원한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지금까지 만났던 누구보다 널 사랑해. 네가 그 부정한 땅에서 사는 모습을 견딜 수가 없어. 나와 함께 살자. 내가 지켜줄게.” “여긴 없는 게 없어. 한마디로 낙원이야.” 멜로디가 아이들을 좋아하는 듯하자 “여긴 엄마의 보살핌이 필요한 고아들이 많다”며 그녀에게 사명감을 불어넣기도 한다. 심지어 빌렐은 연락을 주고받은 지 4일만에 청혼까지 한다. “나와 결혼하면 여왕처럼 대해줄게.”

빌렐은 멜로디를 유혹하면서 자신의 정신세계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그는 자신을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목숨 바쳐 싸우는 투사로 포장하지만, 사실은 이중적인 속물이다. “자본주의는 세상의 질병”이라며 “너희들이 초컬릿 바를 먹고, MTV를 보고, 쇼핑하는 사이 우리는 무슬림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 매일 죽어간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명품 신발과 선글래스를 애용한다. 멜로디가 어머니의 현금 카드를 훔쳐서 시리아에 가겠다고 하자 빌렐은 자신이 쓸 명품 향수를 사오라고 요구한다. 그에게 있어 자본주의란 그저 자신의 명품 소비를 가로막는 장애물에 다름 아니다.

IS 남자들이 먼 유럽에서 여자를 찾는 데는 이유가 있다. “우리는 유럽 자매들과 결혼하길 선호한다”고 엘렐이 취재 중 온라인으로 접촉한 한 IS 남자는 말한다. “시리아 현지 여자는 유럽 여자와 달리 이슬람 율법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시타르(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전부 가리는 옷) 대신 히잡을 쓴다.” 빌렐에 따르면 시리아 여자는 “남자를 기쁘게 할 줄 모른다.” 아내는 “남편의 욕구를 충족시켜줄 의무가 있으며” 이를 위해 “가터 벨트, 망사 스타킹처럼 남편이 좋아할 만한 걸 시타르 밑에 입어도 좋다”고 말한다. 온라인에서 만난 18살 연하 소녀에게 “예쁜 속옷 갖고 있어, 자기?”라고 묻는 중년 남자 빌렐의 모습은 괴이하다 못해 섬뜩할 지경이다.

멜로디는 IS 남자들이 이상적인 신붓감으로 생각하는 유럽 소녀의 전형이다. “멜로디 같은 소녀들을 수없이 만났던” 에렐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멜로디의 내면을 섬세하게 묘사함으로써 IS의 유혹에 넘어가는 청소년들의 심리도 훌륭하게 그려냈다. 그런 소녀들은 “가정환경이 불우하고, 적절한 교육을 받지도 못했으며, 곁에서 지도해줄 사람이 없어 헛소문을 잘 믿는 경향이 있다.” 멜로디를 향한 빌렐의 구애는 IS가 정신적으로 취약한 젊은이들을 어떻게 유혹하는지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IS는 그들이 공허하다고 느끼는 부분을 채워주겠다고 나선다.”

빌렐은 이상적인 여자 멜로디를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한다. 멜로디는 빌렐을 자신의 구원자로 여기고 사랑에 빠진다. 에렐은 관찰자다. 기자로서 에렐은 이 둘의 관계를 객관적인 위치에서 바라보고 있는 그대로 기술할 의무감을 느낀다. 문제는 “조사가 진행될수록 직업적인 거리를 유지하기가 점점 더 힘들어진다”는 것이다. 책에서 끝까지 손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 팽팽한 긴장감은 바로 이 지점에서 나온다. 만약 에렐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빌렐과 멜로디의 대화를 전달하는 데 그쳤더라면, 이 책은 유익했을지 몰라도 이처럼 흥미진진하진 못했을 것이다.

취재가 진행될수록 빌렐은 에렐의 숨통을 조여온다. 빌렐은 시도때도 없이 메시지를 보내고 영상통화를 요구한다. 한 달 가까운 기간 동안 매일 같이 화면을 통해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멜로디와 에렐을 구분하던 벽은 점점 허물어진다. 목소리와 말투를 꾸며대는 데 지치자 자기도 모르게 본래 목소리를 노출하는가 하면, 감정을 통제하기가 힘들어진 나머지 정신분열에 가까운 증상까지 겪는다. 본래 모습을 드러내고 마는 건 빌렐도 마찬가지다. 그는 멜로디가 시리아에 못 가겠다고 말하자 끝내 욕설을 퍼붓기 시작한다. “니가 뭐라도 되는 줄 아냐, 이 년아?”

멜로디가 아닌 에렐 본인의 전화번호로 빌렐의 전화가 걸려오는 순간 이들 간의 긴장감은 절정에 달한다. 전화번호가 알려진 이상 언제 어디서 테러 공격을 당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 기약 없는 도망자 신세가 되리란 사실을 알면서도 에렐은 기사를 출고하고 책을 낸다. IS의 비열하고 이중적인 본모습이 만천하에 드러난 것은 이 같은 의지 덕분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단지 IS만을 얘기하는 책이 아니다. 진실을 알리기 위해 지상 최악의 테러조직에 맨몸으로 맞선 한 기자의 처절한 투쟁 기록이다. 그녀의 용기에 경의를 표한다.

글=이기준 뉴스위크 한국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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