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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범근, 차두리 부자가 남긴 흔적들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여성중앙] ‘차미네이터’(차두리+터미네이터)라 불린 차두리가 태극 마크를 반납했다. 지난 2001년 대표팀에 발탁된 이후 14년 만이다. ‘차붐의 아들’에서 ‘차두리’로 선수 인생을 마친 그와 아버지 차범근 전 감독의 히스토리.

지난 3월 31일 서울 상암동 월드컵경기장. 이날 한국 축구 대표팀과 뉴질랜드의 평가전은 차두리(35세, FC서울)의 대표팀 은퇴 기념 경기이기도 했다. 차두리는 지난 1월 호주 아시안컵 결승에서 호주 에 패한 뒤 대표팀 은퇴를 선언했다. 하지만 울리 슈틸리케(독일) 한국 축구 국가 대표팀 감독이 “이기고 은퇴하라”며 대표팀 은퇴 경기를 마련해줬다. 슈틸리케 감독은 전반 43분 차두리를 교체 아웃시켰다.

임시 주장을 맡은 차두리는 대표팀 주장 기성용(스완지 시티 AFC)에게 주장 완장을 넘겨주며 뜨거운 포옹을 나눴다. 이어 차두리는 손흥민(바이엘 04 레버쿠젠)과도 작별의 포옹을 했다. 손흥민은 이날 ‘두리 형 고마워’라는 자수가 새겨진 축구화를 신고 나왔다. 차두리가 교체되는 순간, 3만 명의 관중은 ‘차두리 고마워’라고적힌 빨간색 응원 도구를 흔들고, 기립 박수를 보냈다. 뉴질랜드 선수들도 박수를 쳤다. “두리 형에게 승리를 선물하자”고 다짐했던 후배들은 약속을 지켰다. 선수들은 벤치에 앉아 있던 차두리에게 달려가 안겼다. 기성용은 차두리의 트레이드마크인 민머리에 입을 맞췄다.

한국이 1 대 0 승리를 거뒀고, 차두리는 이기고 떠났다. 그렇게 차두리의 축구 여행은 ‘차범근의 아들’로 시작해 ‘차두리’로 피날레를 장식했다. “선수로 뛰는 동안 해온 것 이상으로 많은 분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전 잘하지는 못했지만 항상 열심히 하려고 애썼고….”

그는 말을 잇지 못하고 아버지의 품에 안겨 한참을 흐느꼈다. 자신의 축구 인생을 뒤덮었던 깊은 그림자. 도저히 오를 수 없는 벽 같았던 존재. 평생 그를 따라다닌 ‘차범근 아들’이라는 꼬리표. 꽃다발을 들고 나온 아버지 차범근(62세) 전 대표팀 감독의 눈가도 촉촉해졌다. 그랬다. 그는 아버지를 이기기 위해,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기위해 참으로 열심히 뛰었다. 그래서 ‘차미네이터’가 되었고, 14년간 간직했던 태극 마크를 영예롭게 반납할 수 있었다.

아버지 차범근은 자랑이자 족쇄

차두리는 오랜 시간 부친의 그림자에 묻혀 살았다. 차범근은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98골을 터뜨린 전설적인 축구 스타였다. 차두리는 지난해 K리그 베스트 11 상을 받은 뒤 “차범근의 아들로 인정받는 것이 쉽지 않다”고 털어놓았다. 차두리는 어려서부터 ‘아빠처럼’이 꿈이고 희망이었다. 차범근은 칼럼을 통해 차두리의 유년 시절을 소개했다.

차범근은 “두리가 엄마 뱃속에 있을 때 프랑크푸르트 신문들은 ‘zwite chaboom’(두 번째 차붐, 차붐은 차범근의 독일 별명)이 태어날 거라며 지면 한 페이지 를 가득 채웠다”면서 “두리가 초등학교 1학년 때 난 복숭아뼈 밑을 지나는 힘줄이 닳아버려서 잘라내고 이어주는 큰 수술을 받았다. 아래층에서 자고 있는데 새벽에 두리가 막 울어대 놀라서 뛰어올 라갔다. 수술을 하고 깁스를 한 아빠처럼 하고 싶었던 ‘꼬마 두리’는 종아리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자다가 피가 안 통하는 바람에 울고불 고 난리가 난 것이다”라고 전했다.

차범근은 아들에 대한 미안함과 애틋함도 드러냈다. 그는 “(두리가 분데스리가에서 뛰던) 언젠가 독일 잡지에서 선수들 몸에 센서를 잔뜩 붙여놓고 얼마나 솔직하게 대답하는지 체크하는 인터뷰를 했 다. 인터뷰를 마치고 심리학자가 결과를 분석했다. 두리가 재미있어 했는데 한 가지가 아주 부정적으로 나타났다. 아버지 얘기를 할때였다고 했다. 모든 기능이 흥분되고 정상이 아니었다고. ‘아버지에게 피해가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를 모든 일의 가장 앞에 두고 생각하며 사는 게 본인에게는 짐이라고, 벗어나야 삶이 가벼워진다더라”라며 안쓰러워했다.

이어 차범근은 “두리가 고등학교 시절 합숙소 친구들이 모두 이탈했다. 그런데 두리는 ‘나는 아빠 때문에 그렇게 하면 안 된다’며 숙소에 남아 있었던 기억이 난다. 두리에게 아빠는 자랑이기도 하겠지만, 두리가 자유롭게 훨훨 날지 못하게 하는 족쇄이기도 하다”고 밝혔다.

아버지를 따라 고려대에 입학한 차두리는 2002년 한일 월드컵에 깜짝 발탁돼 ‘4강 신화’에 힘을 보탰다. 2002년 독일 분데스리가 레버쿠젠에 입단한 차두리는 7개 독일 팀에서 10년 가까이 200경기 넘게 뛰었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 사상 첫 원정 16강 진출도 이끌었다. 2012년 11월 독일 분데스리가 뒤셀도르프에서 뛰던 차두리와 현지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당시 “축구 인생을 경기에 비유해 달라”는 질문에 차두리는 “후반 40분, 3 대 5로 지고 있다. 내 축구 인생의 승리는 아버지를 이기는 것”이라며 “월드컵 4강(2002년)과 원정 16강(2010년)에 힘을 보탰으니 그래도 세 골은 넣은 것 같다. 3 대 5로 지다가 혼신을 다해 4 대 5를 만들면 져도 팬들은 박수를 쳐 준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 16강행에 도움이 된다면 4 대 5가 되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하지만 차두리는 브라질 월드컵 최종 엔트리에서 탈락했다.

호주 아시안컵 준우승… ‘차두리 고마워’

하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2015년 1월 호주에서 열린 아시안컵을 목표로 다시 뛰었다. 아버지 차범근을 넘어서는 건 힘들지만, 축구 인생 스코어를 4 대 5로 만들기 위해 ‘아우토반’(Autobahn·독일의 속도 무제한 고속도로이자 차두리의 또 다른 별명)’을 질주했다. 한 때 차두리의 휴대전화 SNS 문패엔 이런 문구가 달려 있었다. ‘날지 못한다면 뛰어라. 뛰지 못한다면 걸어라. 걷지 못한다면 기어라. 당신이 무엇을 하든 가장 중요한 것은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의 흑인 민권 운동가 고(故)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연설문 일부다. 차두리는 매번 뛰지는 못했지만 기어서라도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애썼다.

차두리는 호주 아시안컵에서 다시 태극 마크를 단 뒤 투혼을 불살라 준우승을 이끌었다. 우즈베키스탄과의 8강전에선 60m 폭풍 질주 끝에 손흥민에게 멋진 크로스를 올려 쐐기 골을 이끌어냈다. 호주와의 결승에서는 연장까지 120분 풀타임을 소화했다. 결승전 이후 인터넷 포털 사이트 검색어 1위는 ‘차두리 고마워’였다.

차두리는 지난 3월 31일 뉴질랜드와 평가전을 통해 모두의 박수를 받으며 태극 마크를 반납했다. 대한축구협회는 차두리에게 ‘CHA Duri’(차두리 영문 이름)가 금색으로 새겨진 대표팀 유니폼과 금색 축구화를 선물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이후 남편이 지도하는 경기도, 아들의 경기도 떨려서 직접 보지 못했던 어머니 오은미씨는 아들의 대표팀 마지막 경기를 지켜보기 위해 용기 내 경기장을 찾았다. 하프 타임 때 팝 가수 머라이어 캐리의 ‘히어로’가 흐르고, 전광판에 차두리 헌정 영상이 나왔다. 흐르는 눈물을 감추려 두 손으로 두 눈을 가린 차두리는 아버지의 품에 안겨 한참을 흐느꼈다. 차두리는 경기장을 한 바퀴 돌며 관중들로부터 기립 박수를 받았다.

차범근은 “나는 1986년 멕시코 월드컵을 마친 뒤 은퇴 경기 없이 대표팀을 떠났다. 1989년 독일 프로 축구 레버쿠젠 은퇴 경기 때 구단의 배려로 당시 여덟 살이었던 두리를 벤치에 앉혔다. ‘차범근의 아들’로 불리면서 어려움이 많았을 텐데 ‘국가대표 차두리’로 대표팀 은퇴 경기를 치르는 걸 보니 정말 대견하다”고 말했다.

은퇴식에서 아버지 품에 안겨 울 때 어떤 생각이 들었냐는 질문에 차두리는 이렇게 답했다. “아버지의 명성에 도전했고, 아버지보다 잘하고 싶었고, 잘할 수 있을 것이라 믿어왔어요. 하지만 어느 순간 벽을 느끼게 됐죠. 그때부터는 내가 축구를 즐겁게 하며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아버지를 보는 데 큰 짐을 내려놓은 것 같아 홀가분합니다. 한편으로는 아버지 아성에 도전했는데 실패한 것에 대한 자책과 아쉬움이 남아요. 한때 아버지를 미워한 적도 있고요. 워낙 축구를 잘하는 아버지를 둬서, 아무리 열심히 해도 근처에 못 가는 속상함이 컸거든요. 하지만 누가 뭐래도 제 롤모델은 존경하고 사랑하는 아버지입니다. 아버지는 세상을 살면서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에요.”

이젠 지도자 차두리, 축구 인생 연장전

“두리 형을 만나 많은 것을 얻었어요.”

대표팀 주장 기성용은 입버릇처럼 이렇게 말한다. 기성용은 2009년 12월 스코틀랜드 셀틱에 입단했지만 주전 경쟁에서 밀려 힘겨운 시간을 보냈다. 홀로 지내면서 밥에 간장과 달걀을 비빈 ‘간장달걀밥’만 한달 내내 먹은 적도 있다. 7개월 뒤 차두리가 셀틱에 합류했다. 기성용은 “오후 5시가 되면 ‘집으로 밥 먹으러 오라’는 두리 형의 문자 메시지가 정말 좋았다”고 회상했다. 기성용은 훈련이 끝나면 차두리의 집으로 달려가 함께 밥을 먹고 TV를 봤다. 셀틱 초기 기성용은 거친 스코틀랜드 리그에서 자신감을 잃은 상태였다. 과감한 플레이도, 몸싸움도 주저했다.

이때 차두리는 “패스만 하지 말고 필요하면 과감하게 치고 들어가라”는 조언을 해줬다. 차두리와 2년간 한솥밥을 먹은 기성용은 유럽 톱클래스로 성장했다. 기성용은 2012년 8월, 100억원이 넘는 이적료를 기록하며 잉글랜드 스완지시티로 이적했다. 차두리는 “2년간 옆에서 성용이가 엄청나게 발전한 것을 지켜보니 정말 뿌듯했다. 내가 감독이 된 것 같았다. ‘감독님들은 이런 기분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차두리는 이제 독일로 건너가 지도자 자격증을 딸 계획이다. 차범근은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대표팀을 맡았지만, 성적 부진으로 중도 경질됐다. 그는 감독이 얼마나 힘든 직업인지 생생히 목격했다. 하지만 자신의 보살핌 아래 성장을 거듭한 기성용을 지켜보며 재활센터 건립, 유소년 육성과 함께 지도자를 자신의 꿈에 포함시켰다.

그는 후배들을 이끌면서 리더로서 충분한 자질을 보여줬다. 2014년 5월 튀니지와 치른 평가전에서 왼손으로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한 기성용은 새벽 2시에 차두리에게 전화를 걸어 “형, 너무 긴장한 탓에 큰 실수를 했어”라고 하소연했다.

기성용을 애칭 ‘기똥이’라 부르는 차두리는 후배를 진심으로 위로해줬다. 2008년 손흥민이 독일 함부르크 입단 테스트를 받을 때도 차두리가 도움을 줬다. 당시 함부르크 유소년팀 코치가 차두리의 친구였다. 그는 독일어가 서툰 손흥민을 대신해 통역을 자처했다. 지난 1월 아시안컵 대표팀 코치였던 신태용 올림픽팀 감독은 “두리가 후배들을 정말 잘 챙기고, 후배들도 두리를 잘 따랐다. 좋은 감독이 될 수 있는 충분한 자질을 갖췄다”고 말했다.

차두리는 “나는 선수 시절 빛만 보신 아버지와는 다르다. 나도 잠깐 빛을 본 적이 있지만 어둠도 익숙하다”며 “후보들, 새내기들, 막내들의 마음을 잘 안다”고 말했다. 아버지와 달리 차두리는 벤치의 설움, 2부 리그 강등 등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 차범근도 “두리는 나보다 훨씬 다양한 재능을 갖고 있다. 지도자도 잘할 것 같다”고 내다봤다.

차두리는 호주 아시안컵 우즈베키스탄과의 8강전에서도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보여줬다. 당시 오른쪽 공격수 손흥민은 전?후반을 득점 없이 마친 뒤 도저히 못 뛰겠다고 했다. 상대 왼쪽 수비가 공격적으로 나와 손흥민은 수비까지 하느라 체력 부담이 컸다.

차두리는 “나는 감독 전술에 크게 관여하고 싶지 않아 항상 입을 다물고 있었는데, 그날은 꼭 이기고 싶었다. 내 아시안컵이 8강에서 끝나길 원치 않았다” 그래서 “슈틸리케 감독님에게 ‘흥민이가 많이 피로하니 변화를 주는 게 낫지 않을까요? 흥민이를 최전방 공격수로 올리고, 체력이 좋은 이근호(엘자이시)를 오른쪽 측면으로 돌리는 게 어떨까요. 흥민이가 결정력이 있으니 한 방을 기다립시다’라고 조심스럽게 의견을 제시했다”고 말했다.

차두리의 예상대로 손흥민은 연장에서 2골을 폭발시키며 승리를 이끌었다. 차두리의 지도자 자질은 이뿐만이 아니다. 뉴질랜드 전 이후 차두리는 훌륭한 지도자가 될 거란 신뢰를 갖게 하는 말들을 남겼다. “대표팀 선수는 하늘에서 점지한 선수들만 할 수 있다. 수많은 선수가 대표팀에 뽑히지 못한다. 감사하고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중고등학교 때 경기가 끝난 뒤 아버지에게 전화가 오면 ‘열심히 했다’고 답했다. 대학교 때도 ‘열심히 했다’고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아버지가 ‘이제 열심히 하면 안 되지. 잘해야지’라고 하셨다. 순간 멍해졌다. 열심히 한다는 말은 굉장히 큰 함정이다. 유럽에서 뛰어보니 ‘열심히’는 기본이다. 공을 위해 모든 것을 쏟아내는 건 기본 바탕이다. 그다음에 좀 더 간결하게, 정교하게, 그게 잘하는 거다. 우리도 그렇다면 세계의 벽에 근접할 수 있지 않을까.”

은퇴 경기를 마친 차두리에게 물었다. “3년 전 축구 인생을 경기에 비유해달라는 기자의 질문에 ‘후반 40분, 3 대 5로 지고 있다’고 답했는데, 지금은 몇 대 몇이냐”고.

“3 대 5로 그대로 끝났어요. 종료 직전 골대 2번을 맞혔고요. 서울 소속으로 2013년 아시아 챔피언스리그 결승에서 졌고, 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이번 아시안컵에서 준우승에 머물렀어요. 우승 타이틀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많았는데 그러지 못했죠. 빈손이잖아요. 만회 골을 넣지 못하고 끝난 거죠.”

‘선수 차두리’의 축구 인생은 3 대 5로 끝났다. 하지만 ‘지도자 차두리’는 5 대 5 동점은 물론 아버지를 넘어 6 대 5 대역전승을 거둘 가능성도 있다. 이날 차두리의 휴대전화 SNS 문패에 달린 독일어 문구는 이랬다.

‘Meine beste Zeit kommt noch(내 최고의 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

History

1 한국 대표팀 시절 차범근. 차범근은 한국 대표팀 최다 골 보유자다. A매치 132경기에 출전해 59골을 기록했다.

2 차범근은 독일에서 ‘차붐’이라 불렸다. 범과 발음이 비슷한 붐은 폭발음이라는 뜻. ‘차붐’은 차범근의 폭발적인 골 결정력에 빗대 붙은 닉네임이다.

3 독일 분데스리가 프랑크푸르트 시절 차범근. 차범근은 프랑크푸르트와 레버쿠젠 소속으로 두 차례나 유럽축구연맹컵 우승을 경험했다.

4 차범근은 태극 마크를 달고 1976년 박정희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말레이시아전에서 후반 종료 7분을 남기고 1 대 4로 뒤진 상황에서 해트트릭을 작성했다.

5 프랑크푸르트 시절 차범근. 차범근은 구단 역대 베스트 11에 뽑혔고, 프랑크푸르트 지하철역에는 지금까지 차범근의 사진이 걸려 있다.

차붐의 나라에서 왔나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는 지금도 ‘차붐(Cha Boom)의 향기’가 진동한다. 2012년 11월 독일 분데스리가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대 아우크스부르크전이 열린 프랑크푸르트의 홈 구장 코메르츠방크 아레나를 찾은 적이 있다. 구단 박물관과 경기장에는 ‘프랑크푸르트 레전드’ 차범근의 발자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현역 시절 1979년 당대 유럽 최고 리그로 꼽힌 분데스리가에 진출한 차범근은 통산 98골(308경기)을 넣으며 ‘갈색 폭격기’로 맹위를 떨쳤다. 프랑크푸르트와 레버쿠젠 소속으로 두 차례나 유럽축구연맹(UEFA)컵 우승을 경험했다. 프랑크푸르트가 1980년대를 소개하는 곳에는 차범근이 빠짐없이 등장했다. 구단 직원 빌리 오트 씨는 “차붐은 프랑크푸르트 레전드”라고 극찬했다. 프랑크푸르트 팬들은 일본인 이누이 다카시가 공격수로 활약하고 있지만, 동양인 기자를 보고 “차붐의 나라에서 왔나”라고 물었다. 프랑크푸르트 지하철역에는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구단 역대 베스트 11 사진이 걸려 있다. 당연히 차범근도 ‘프랑크푸르트 11개의 기념비’에 포함됐다.

‘차붐’은 차범근의 별명이다. 범과 발음이 비슷한 붐은 폭발음이라는 뜻이다. 차범근의 폭발적인 골 결정력에 빗대 붙여졌다. 차범근은 스테판 사퓌자(스위스)가 1999년 기록을 깨기 전까지 분데스리가 외국인 최다 골 기록을 보유했다. 차범근의 99골은 페널티킥 한 번 없이 100% 필드 골이라 더욱 값지다.

1985?1986시즌 레버쿠젠 소속으로 19골을 터뜨린 차범근은 지금도 한국 선수 분데스리가 최다 골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차범근은 독일에서 옐로카드를 딱 한 장만 받을 만큼 페어플레이를 펼쳤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독일의 우승을 이끈 요아힘 로브 감독은 현역 시절 프랑크푸르트에서 차범근의 백업 멤버였다. 차범근은 한국대표팀 최다 골 보유자이기도 하다. A매치 132경기에 출전해 59골을 터뜨렸다. 차범근은 1976년 박정희대통령배 국제 축구 대회 말레이시아전에서 후반 종료 7분을 남기고 1 대 4로 뒤진 상황에서 3골을 몰아쳐 해트 트릭을 작성하기도 했다. 1989년 현역 은퇴한 차범근은 대표팀 감독을 맡아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 최종 예선을 파죽지세로 통과했다. 하지만 본선에서 성적 부진으로 중도 경질됐다. 차범근은 국내 프로 축구팀인 수원 삼성 블루윙즈를 맡아 2004년과 2008년 K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전문성과 스타성을 두루 갖춘 차범근은 2002년과 2006년, 2010년 월드컵에서 TV 해설위원으로 변신했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우루과이와 16강전 때는 67.1%라는 경이로운 시청률을 기록하기도 했다.

History

1 배재고등학교 시절 차두리. 차두리는 청소년 대표에는 뽑히지 못했다. 하지만 학창 시절부터 아버지의 탁월한 피지컬을 물려 받아 무궁한 성장 가능성을 보였다.

2 아버지를 따라 고려대에 진학한 차두리.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히딩크 한국 대표팀 감독은 육상 단거리 선수처럼 100m를 11초 대에 주파하는 차두리를 깜짝 발탁했다.

3 등 번호 11번 유니폼을 입고 그라운드를 누비는 차두리. 11번은 아버지 차범근이 국가 대표 시절 달았던 번호와 같다. 차두리는 A매치 76경기 중 11경기에서 11번을 달고 뛰었다.

4 차두리는 1980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났다. 2004년부터 고향 팀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에서 3년간 뛰었다. 프랑크푸르트는 아버지 차범근이 활약했던 팀이기도 하다.

5 차두리가 2014년 1월 아시안컵 우즈베키스탄과 8강전에서 손흥민을 끌어 안고 있다. 손흥민은 이날 연장에서만 2골을 몰아치며 4강 진출을 이끌었다.

한때 공보다 빨랐던 ‘차미네이터’ 차두리

“한때 공보다 빨랐다. 패스를 길게 줘도 받아낼 만큼 스피드가 좋았다.”

셀틱 시절 한솥밥을 먹었던 기성용은 차두리를 이렇게 묘사했다. 차두리는 고려대에 재학 중이던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대표팀에 깜짝 발탁됐다. 성인 대표는 물론 청소년 대표도 못 해본 풋내기가 월드컵 대표팀에 뽑혔다. 일각에서는 ‘아버지 차범근의 후광으로 뽑혔다’고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하지만 당시 한국을 이끈 거스 히딩크(네덜란드) 감독은 육상 단거리 선수처럼 100m를 11초대에 주파하는 차두리를 뽑았다.

2001년 11월 18일 세네갈과 평가전에서 국가대표 데뷔전을 치른 차두리는 2002 월드컵 16강전 이탈리아와 경기에서 환상적인 오버헤드킥 슛을 날리는 등 4강 신화에 힘을 보탰다. 역대 가장 기억에 남는 감독으로 히딩크를 꼽은 차두리는 “웬만한 배짱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히딩크 감독님은 스피드와 파워가 좋다는 장점을 높이 사서 나를 월드컵에 데려갔다”고 회상했다.

차두리는 2004년 부산에서 열린 독일과 평가전에서 약 70m를 질주하며 독일 수비 3명을 제치는 등 맹활약해 3 대 1 승리를 이끌었다. 차두리는 또 A매치 38경기에선 오른쪽 공격수로, 38경기에선 오른쪽 수비수로 뛰었다. 2006년 독일월드컵 대표팀에서 탈락한 뒤 대표팀과 유럽에서 살아남기 위해 수비수로 변신했다. 2002년 독일 분데스리가 레버쿠젠에 입단한 그는 7개 독일 팀에서 활약했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 우승국 독일의 자국 리그에서 차두리는 10년 가까이 200경기 넘게 뛰었다.

수비수로 변신한 그는 2010년 일본과 평가전에서 일본 선수들을 차례로 튕겨내며 공격에도 가담했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로봇을 연상시키는 피지컬과 스피드를 선보이며 사상 첫 원정 16강 진출을 이끌어 ‘차미네이터’란 별명을 얻었다. 당시 “로봇이 아니냐”는 질문에 차두리는 “등에 USB를 꽂고 재충전했기 때문에 활기찬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을 것 같다”고 재치 있게 답했다.

차두리는 허정무·조광래 전 대표팀 감독 시절 부동의 오른쪽 수비수였다. 하지만 2011년 12월 이후 최강희·홍명보 전 대표팀 감독 체제에서 외면당했다. 홍명보 감독은 브라질 월드컵에서 오른쪽 풀백과 베테랑의 부재를 절감하며 조별 리그에서 탈락했다. 차두리의 빈자리가 컸다. 2013년 K리그 FC서울에 입단한 차두리는 거의 전 경기 풀타임을 뛰며 ‘노장은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했다. 슈틸리케 축구 국가 대표팀 감독 부임 후 차두리는 지난해 9월 베네수엘라와 평가전에서 2년 10개월 만에 태극 마크를 달았다. 지난 1월 아시안컵에서 다시 태극 마크를 단 차두리는 준우승을 이끌며 ‘차두리 신드롬’을 일으켰다. 그리고 FC 서울에서 마지막 불꽃을 태우다 명예롭게 은퇴했다.

기획 여성중앙 정은혜, 사진 박린 기자(중앙일보 스포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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