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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 일본 기행] 2. 무너지는 평등사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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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일본 도쿄(東京)의 외국계 금융회사 임원인 일본인 K씨(34)는 지난해 말 부유층이 많이 사는 미나토(港)구에 있는 고급 맨션 내 전용면적 40평짜리 집으로 이사했다.

맨션에는 길이 20m의 실내 수영장과 거품이 나오는 욕탕이 있다. 월 임대료는 1백40만엔(약 1천4백만원), 연간 1천6백80만엔이다. K씨는 "회사 연봉이 기본급(약 3천6백만엔)과 보너스를 합치면 최소 6천만엔 이상은 돼 부담은 없다"고 말했다.

K씨의 연봉은 일본 직장인 평균 연봉(4백50여만엔)의 13배 정도로 상위 1% 안에 들어간다. 게이오(慶應)대를 졸업하고 미국 유명대학의 MBA 과정을 마친 그는 "유학비로 연간 1천만엔이 들었지만 변호사인 아버지가 전액 지원해줬다"며 "주말에는 아내.딸과 고급 백화점.매장에서 쇼핑을 즐긴다"고 말했다.

세계적인 고급브랜드 상품이 몰려 있는 도쿄 긴자(銀座) 의 중앙로는 갈수록 외국 고급브랜드 매장이 증가하고 성업 중이다.'페라가모'매장이 개장하던 지난달 7일 오전 11시. 30분 전부터 1백m 이상 줄을 서서 기다리던 2백여명은 개장과 함께 물밀듯이 들어갔다.

중앙로에는 올 들어 '프라다'(3월).'페라가모'가 문을 연 데 이어 '카르티에'(7월).'샤넬'(10월) 등이 진출할 예정이다. "장기불황인데 왜 고급브랜드업체들이 많이 진출하느냐"고 물었더니 페라가모 매장 관계자는 "어차피 일본의 부자들 상대 장사인데, 그들은 줄지 않았다"고 답했다.

가나가와(神奈川)현의 대형 수퍼마켓 관리직원인 고마다(兒玉.56)씨는 갈수록 쪼그라드는 생활에 울분이 터진다. 그는 "경영 악화로 지난해 4월부터 근속수당이 없어지고 직급.능력급만 남았다. 젊은 직원들에게 밀려 직급도 최하가 됐다. 임금이 30%나 깎여 연봉이 4백50만엔 수준이다. 처음에는 해고되지 않아 다행으로 여겼지만 지금은 '20여년간 회사에 몸바친 결과가 이거냐'는 생각에 화가 난다"고 털어놓았다.

도쿄 시내 오피스 빌딩가에선 점심 시간에 맞춰 3백~6백엔 정도의 도시락을 파는 미니 봉고차들이 갈수록 늘고 있다. 샐러리맨들은 줄을 서서 도시락을 사 가지고는 사무실로 들어간다. 최하 2백엔대 음식을 파는 체인점 요시노야(吉野家)는 지난해 매출이 8백65억엔으로 3년 전보다 11% 늘었다.

일본은 경제가 최고조에 달했던 1980년대 '1억 중산층 시대'를 선언했다. 그러나 버블 붕괴 후 10여년이 지난 지금, 일본이 자랑하던 경제적 평등이 무너지는 모습이 곳곳에서 보인다.

국세청에 따르면 2001년 직장인 4천5백여만명 가운데 고연봉자(8백만엔 이상)는 10.8%였으나 이들이 받은 연봉의 총액(55조6천억여엔)은 전체의 52%인 저연봉자의 총액(4백만엔 이하)과 거의 같다. 97년과 2001년을 비교하면 고연봉자의 1인당 평균 연봉은 1천1백15만여엔에서 1천1백38만여엔으로 2.1% 늘었다.

그러나 저연봉자의 평균연봉은 2백38만여엔으로 제자리걸음이다. 저연봉자 비중도 전체 직장인의 49.3%에서 52%로 증가했다. 중간층이 줄고 상.하위층의 격차가 커진 것이다.

그나마 줄어든 월급봉투라도 받는 사람은 다행이다.

도쿄 신주쿠(新宿)구 도쿄도청 앞 주오(中央)공원은 노숙자들의 푸른색 텐트로 뒤덮여 있다. 도쿄.오사카(大阪) 등 대도시의 웬만한 공원.하천가의 목 좋은 곳은 노숙자들이 차지하고 있다.

후생노동성에 따르면 지난 2월 전국의 노숙자는 2만5천여명으로 3년 전보다 57%나 늘었다. 상당수는 도산.실업 등으로 일자리를 잃어버린 사람들이고, 지난 5년 사이 노숙자가 됐다. 심지어 30대 이하 젊은층이나 여성도 있다.

노숙자 지원단체인 신주쿠연락회의 가사이 가즈아키(笠井和明)는 "노숙자 대부분은 1년 만에 가정에서도 완전히 버림받는다"며 "식량 등을 돕고 있는데 갈수록 늘어 걱정"이라고 말했다. 주가 하락 등으로 빚을 갚지 못해 스스로 경제활동을 포기하고 파산신청을 한 개인이 지난 10년간 1백여만명에 이른다.

오사와 마리(大澤眞理) 도쿄대 교수(사회과학)는 "세계에서 빈부격차가 가장 큰 미국 수준은 아니지만 독일.영국만큼은 됐다"고 평가했다. 다치바나키 도시아키(橘木俊詔 ) 교토대 교수(경제)는 "고령화 사회가 되면서 노인들의 빈부격차가 반영된 점은 있지만 무엇보다 실업 등 고용붕괴가 큰 원인"이라며 "같은 젊은층이라도 정사원.파견사원.아르바이트생 등으로 구분되는 등 젊은층 간 격차도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따라서 살기 힘들다는 국민이 54%(후생노동성 2002년 여론조사)나 된다.

일본 노동조합총연합회 산하 종합생활개발연구소의 구리바야시 세이(栗林世)소장은 "디플레로 인한 물가 하락의 약효가 떨어졌다"고 강조한다. "기업이 고정투자비 때문에 물가하락률보다 임금을 더 낮춰야 하는 시점에 도달했기 때문에 저소득층이 더욱 늘 것"이라는 것이다.

광고대행사인 스타지오 에지의 나가세 미치오(長瀨充夫)사장은 "2011년 디지털TV 시대가 열리면 현재의 아날로그TV는 쓸모가 없어진다"며 "그때 가난을 실감하고 사회에 불만을 갖는 국민이 많아질 것"이라고 걱정했다.

다치바나키 교수는 "정부가 시장원리를 중시하는 미국식 정책을 따라가고 있고, 연공서열보다 능력급을 중시하는 기업이 많아져 빈부격차는 갈수록 확대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갈수록 벌어지는 소득격차는 세습될 것이라는 우려가 많다. 야마다 마사히로(山田昌弘) 도쿄가쿠게이대 교수(교육)는 "과거에는 가난해도 본인이 노력하면 됐지만 지금은 교육에 힘쏟는 부유층과 일찌감치 포기하는 가정으로 양극화되고 있다"며 "중학교의 20%만이 미래를 밝게 생각할 정도로 일찌감치 공부를 포기하는 학생도 늘었다"고 말했다. 교육비의 격차가 워낙 크기 때문이다.

야노(矢野)경제연구소에 따르면 사립 초.중.고를 다닐 경우 수업료가 최대 1천4백만엔(게이오대 계열)까지 든다. 공립 초.중.고의 수업비(34만엔)의 41배다. 사립의 경우 같은 계열 대학에 쉽게 입학하는 '특권'도 있고 명문대 입학생의 사립고교 출신의 비율이 늘고 있다.

사립학교들이 비싼 수업료를 바탕으로 질높은 교육프로그램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도쿄대 재학생의 경우 사립고 출신이 88년 52.6%에서 2001년에는 62.1%로 늘었다. 지난해는 도쿄대의 학부모 평균 수입이 연 1천만엔을 돌파한 것으로 전해져 화제가 됐다.

도쿄=오대영 .김현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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