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 강박 시대 … 3명 중 1명 “SNS서 행복 과장해봤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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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정보기술(IT) 기업에 다니는 김하나(31)씨는 업무용 다이어리와 개인 다이어리를 구분해 따로 들고 다닌다. 업무용엔 회사와 관련된 일정이, 개인용엔 가족·지인들과의 약속이나 주말 계획이 적혀 있다. 요즘 가장 공들여 작성하는 건 한 달 앞으로 다가온 휴가 계획이다. 김씨는 “사회생활과 개인의 삶을 명확하게 구분하려는 것”이라며 “일도 중요하지만 가족·친구들과 함께하는 일상 속에서 훨씬 큰 기쁨을 느낀다”고 말했다.

 ‘당신은 언제 가장 기쁘십니까.’ 한국인들은 국가적 이벤트나 사회생활보다 소소한 일상 속에서 기쁨을 추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본지가 빅데이터 분석업체 다음소프트와 7년6개월간(2008년 1월~2015년 6월 9일) 트위터·블로그에 올라온 데이터 70억 건을 분석한 결과다. ‘즐겁다’ ‘행복하다’ 등 기쁨 관련 감성연관어는 여름휴가·크리스마스 등 주로 휴일 기간에 급증했다. 평소 10만 건당 평균 3535건에 그쳤던 기쁨 연관어는 휴일 기간 5479건으로 약 55%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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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쁨 연관어 중 ‘즐겁다’와 함께 언급된 단어를 분석해 보니 ‘여행’이 11만484건으로 가장 많았다. ‘아이(8만8713건)’ ‘친구(6만9203건)’ ‘엄마(3만3231건)’ ‘가족(3만1883건)’ 등 가족·지인과 연관된 단어가 뒤를 이었다. ‘노래(2만7952건)’ ‘영화(2만6637건)’ ‘공연(2만4365건)’ 등 문화생활에 대한 연관어들도 상위권을 차지했다.

 본지가 성인 남녀 23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도 이런 추세가 확인됐다. 응답자 중 37.8%가 ‘가족·지인과 시간을 보낼 때’를 가장 기쁜 순간으로 꼽았다. ‘이성친구와 시간을 보낼 때(14.8%)’ ‘혼자 휴식할 때(12.2%)’가 뒤를 이었다. ‘학교·직장에서 성과를 거둘 때’와 ‘승진이나 월급인상’이라고 응답한 비율은 각각 10.9%, 7.3%였다. 1년 중 가장 기쁜 순간을 묻는 질문엔 응답자의 45.7%가 방학이나 휴가라고 답했다. ‘생일이나 기념일’ ‘크리스마스 등 휴일’이라는 응답이 각각 21.7%, 13.9%로 뒤를 이었다. 학교 축제나 직장 행사에서 기쁜 감정을 느낀다는 응답은 8.3%에 그쳤다. 응답자들은 “직장에서의 스트레스를 일상생활과 휴일에서 얻는 기쁨을 통해 해소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시민들이 추구하는 가치와 실제 삶은 크게 달랐다. 사회생활과 학업에 치여 실제론 여행이나 문화생활 등 야외활동을 제대로 즐기지 못한다는 응답이 많았다. 응답자의 61.4%가 야외활동을 한 달에 두 번 이하밖에 못한다고 답했다. 한 달에 한 번도 야외활동을 하지 못한다는 응답도 7.8%에 달했다. 한 달에 네 번 이상 야외활동을 즐긴다고 응답한 비율은 19.1%였다.

 일상에서 기쁨을 찾는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론 여가를 즐기지 못하는 괴리에 대해 전문가들은 “한국인들이 남들보다 즐거워야한다는 일종의 ‘기쁨 스트레스’에 시달리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고려대 고영건(심리학) 교수는 “기쁘고 행복한 삶도 일종의 스펙이나 남보다 잘해야 하는 것처럼 인식되는 것”이라며 “행복한 삶을 위한 사회적 여건이나 시스템이 부재한 상황에선 단편적인 보여주기식 ‘기쁨 경쟁’에 매달리는 사람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본지 설문조사 결과 3명 중 1명은 ‘기쁨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78명(33.9%)이 ‘트위터·페이스북 등 SNS에서 기쁨·행복을 과장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본인의 감정을 과장한 이유에 대해선 ‘남들에게 뒤처지고 싶지 않아서(53.8%)’라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 그 뒤를 ‘스스로 만족하기 위해서(26.9%)’ ‘지인에게 걱정을 끼치기 싫어서(10.3%)’ 등이 이었다. 회사원 장모(29)씨는 “지인들이 SNS에 행복한 일상을 올리는 걸 보면 나만 무미건조한 삶을 사는 게 아닌가 싶을 때가 많다”며 “남들에게 내 기쁨을 보여주고 싶다는 강박감에 습관적으로 스마트폰을 꺼내 ‘인증샷’을 올리게 된다”고 했다.

 이화여대 양윤(심리학) 교수는 “과거 권위주의 시절 정부 주도 행사 등 국가적 이슈에서 즐거움을 찾던 한국인들이 개인의 일상에서 기쁨을 찾으려는 경향이 뚜렷해지고 있지만 실제로 느끼는 기쁨의 감정은 과장되거나 현실과 동떨어진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양 교수는 “개인의 행복을 알아서 찾으라는 식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들이 기쁜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공공 행복’을 지향하는 사회적 기반과 정책이 필요하다”고 제시했다.

◆특별취재팀=정강현(팀장)·유성운·채윤경·손국희·조혜경·윤정민 기자 fone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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