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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션 지드래곤, 미술관에 간 까닭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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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1호 25면

1 권오상 작가의 ‘무제의 G-Dragon, 이름이 비워진 자리’. 2차원 예술인 사진을 3차원의 조각으로 구현한 것이 특징이다. 성미카엘 천사와 악마 모두 지드래곤의 얼굴로 만들어 선과 악의 이중성을 보여준다.
2, 6 방&리의 ‘TV에 나오지 않는, 바퀴 달린 혁명’ 앞에 선 지드래곤. 지드래곤이 작곡한 음악과 작가가 만든 사운드가 조명과 어우러지고 카메라는 무대에 선 관객을 실시간으로 비춘다.
3, 4, 8, 9 패브리커와 지드래곤이 함께 꾸민 ‘(논)픽션 뮤지엄’. 지드래곤의 사진으로 구성된 큐브와 뮤직비디오에 등장했던 마네킹 등 다양한 소장품을 만나볼 수 있다. 오빅스 등 지드래곤과 함께 작업하거나 영감을 준 예술가들의 작품도 함께 전시돼 있다.

피스마이너스원(PEACEMINUSONE). 이 단어에는 그룹 빅뱅의 지드래곤(27ㆍ본명 권지용)이 추구하는 세계관이 담겨 있다. 평화로운 유토피아적 세계와 결핍이 있는 현실 세계 사이에는 이상과 현실이 만나는 교차점이 존재한다는 것.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에 마련된 ‘피스마이너스원: 무대를 넘어서’(6월 9일~8월 23일)는 이 같은 지드래곤의 정신세계에 기반한 전시다.

서울시립미술관의 ‘피스마이너스원: 무대를 넘어서’

국내 미술관에서 처음 열리는 대중음악 팝스타의 기획전인 만큼 주목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지드래곤이 누구인가. 곡을 썼다 하면 음원차트 올킬, 몸에 걸쳤다 하면 쇼핑몰 완판을 자랑하는, 음악계와 패션계를 오가는 스타일 아이콘 아니던가.

8일 기자간담회에서 지드래곤은 “가수는 대중에 계속 보여지는 직업이기 때문에 뮤직비디오를 연출하고 앨범 재킷 작업을 하며 자연스럽게 공부 아닌 공부를 하게 됐다”며 “저는 작은 매개체지만 저를 통해 많은 분들이 미술관이라는 재미있는 공간에 놀러오셨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그가 국내외 작가 14팀과 협업해 구현한 세계는 과연 어떤 곳일까.

5, 7 손동현 작가의 ‘힙합음악 연대기’와 파비앙 베르쉐르의 ‘30개의 파편화된 환상’. 지드래곤이 좋아하는 가수나 단어 등을 작가와 공유하고 이를 모티브 삼아 만든 작품이다.

문자도부터 천사상까지  눈으로 만나는 지디의 감각
인트로에 해당하는 (논)픽션 뮤지엄은 흡사 지드래곤의 뇌구조를 보는 듯하다.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8시에 멈춰있는 커다란 원형 시계다. 그가 입던 옷을 재활용해 만든, 그가 행운의 숫자로 여기는 8을 부각하는 이곳은 오롯이 그를 위한 시공간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아티스트 그룹 패브리커와 함께 꾸민 공간은 어두운 조명과 폭신한 카페트가 어우러져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관람객의 후각을 자극하는 향까지 본인이 직접 골랐다니 진정 ‘웰컴 투 지디 월드’라 할 수밖에.

직접 녹음한 오디오 가이드는 소장품 및 아티스트와의 인연을 들려준다. 대표적인 것이 뉴욕에서 활동하고 있는 신진 작가 오빅스다. “인스타그램을 통해 알게 됐는데 직접 작업실을 방문할 기회가 생겨 친분을 쌓게 됐다. 젊은 작가를 돕고 싶은 마음에 솔로 2집 작업을 함께 하게 됐다”는 것이 지디의 설명이다.

그는 “아직 미술에 대해 알아가고 있는 단계이기 때문에 컬렉션에 특별한 기준은 없다”고 했다. 하지만 노래 가사에 사랑 이야기를 많이 써왔기에 가슴에 그만큼 더 와닿아 구입했다는 트레이시 에민의 네온 설치작품 ‘I promise to love you’나 캔버스 대신 알루미늄판 위에 한 가지 색상으로 그린 소용돌이 문양이 관능적인 제이슨 마틴의 ‘Fetish’를 보면 그의 취향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엿볼 수 있다. 게리트 리트벨트의 적청의자 목각본을 사들여 배명주 장인과 함께 나전칠기 양식으로 재탄생시킨 버전을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으로 꼽는 걸 보니, 보고 사고 즐기는 걸 넘어 직접 만드는 디자이너로서의 그를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시는 아티스트로서의 그를 다양한 각도로 비추며 피스마이너스원의 시공간을 확장해 나간다. 건축사사무소 SoA는 2층에서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마저 전시장으로 탈바꿈시켰다. 가설 무대 뒷면에 사용되는 비계와 회화 작가들이 자주 마주하는 몰딩을 변형해 가상과 현실을 연결짓는 통로 역할을 맡겼다.

메시지와 그림을 담아내는 공간 역시 캔버스에 한정짓지 않는다. 작가 손동현은 지드래곤이 천착하는 장르인 힙합을 가장 동양적인 방식인 문자도(文字圖)로 풀어낸다. ‘HIPHOP’이라는 여섯 글자는 1990년대를 대표하는 가수 2PAC부터 최근 가장 핫한 신인 랩퍼 켄드릭 라마에 이르기까지 20여명의 얼굴을 품은, 힙합 역사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초상화로 완성됐다.

프랑스 작가 파비앙 베르쉐르의 파편화된 환상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지드래곤이 직접 고른 30개의 단어를 ‘삶(life)’과 ‘죽음(death)’ 등 대립항을 만들어 풀어냈다. 어릴 적 잦은 병치례로 걸핏하면 병원 신세를 져야했던 작가가 창조해낸 혼종 괴물 모티프, 그리고 무대 위 지드래곤과 실재하는 권지용 사이를 끊임없이 고민하는 정체성에 관한 주제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셈이다.

팬들이 눈독들일 만한 작품도 준비돼 있다. 평면의 사진을 입체적 사진 조각으로 풀어내는 작가 권오상은 인터넷에 떠도는 지드래곤의 사진을 모아 성미카엘 대천사가 악마와 싸우는 거대한 조각상으로 변모시켰다. 사방에 장식된 거울이 서로의 모습을 끝없이 반사하면서 선과 악의 이중성 위에 주체와 대상의 이분법까지 얹어져 관람객으로 하여금 사색의 기회를 제공한다. 권 작가는 “기획부터 제작까지 1년 가까이 의견을 나누면서 아이디어를 발전시켰다”며 “지드래곤이 평소 운석에 관심이 많다고 해서 같은 책을 보고 차용한 이미지를 활용하기도 했다”며 협업 소감을 밝혔다.

10 제임스 클라의 조명. 건축 조명가인 클라는 현실과 가상공간을 오가는 사회적 관계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빛으로 표현했다.

“나를 통해 작가 한 명, 작품 이름 하나라도 알면 만족”
하지만 모든 전시가 일관성 있게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작가 14팀의 특징이 모두 다른 것은 차치하더라도 일부 작품의 경우 지드래곤과의 연관성을 찾아보기 힘들다. 런던에서 활동하는 이타리아 아티스트 콰욜라의 ‘포로 Captive’의 경우 작가가 디자인한 도안을 토대로 한국에서 로봇이 깎아낸 조각 작품이다. 국내에서 디지털 파브리케이션의 첫 시도라는 점에서 의미는 있지만 SNS를 통해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지드래곤과 각자 다른 방식으로 그를 향유하는 미학이 접점이라는 설명은 지나치게 옹색하다.

작가 중 유일하게 지드래곤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던 미국 작가 마이클 스코긴스의 작품 역시 지드래곤과의 연결고리는 ‘숨쉴 수 없어(I can’t breathe)’라는 가사 밖에 없다. 그마저도 지난해 흑인이라는 이유로 경찰 과잉진압의 희생자가 됐던 에릭 가너의 유언에서 따왔다니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걸까. 작가진의 기존 작품과 이번 전시를 위한 새 작품이 섞여 있는 점 역시 혼돈을 더하는 요소다.

YG 엔터테인먼트의 제안으로 전시를 기획한 서울시립미술관 김홍희 관장은 “포스트 뮤지엄 큐레이션은 전시를 해석적 텍스트로 바라보고 작품의 자산가치보다는 시의성을 중시하며 크로스 장르를 옹호한다”며 “고급미술과 대중문화의 만남을 입증하고 있는 이번 전시가 좋은 전형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김 관장이 세계적인 트렌드로 예를 든 영국 가수 데이비드 보위(68)나 아이슬란드 가수 비요크(50)는 이미 수십 년의 시간을 두고 쌓아올린 예술적 자산이 있기에 그 결이 다를 수밖에 없다.

허나 지드래곤의 항변도 일리는 있다. 그가 프랜시스 베이컨의 작품에서 받은 영감을 바탕으로 신곡 ‘BAE BAE’를 썼지만 영감을 받은 대목이 곡 중 어느 부분이냐고 물으면 딱 꼬집어 말할 순 없는 것처럼, 예술이란 것이 본디 스며들 뿐 티가 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바람 역시 소박하다. “학교 미술시간 외에 미술 공부를 한 적이 없는 분들이 저 때문에 가벼운 마음으로 미술관에 발을 들여놓고 작가 한 명, 작품 이름 하나라도 알게 된다면 그게 공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마치 그가 솔로곡 ‘쿠데타’에서 외쳤던 “혁명은 텔레비전으로 방송되는 것이 아니다. 네 마음에 있고 여기에 있을 뿐(The revolution will not be televised. The revolution is in your mind. The revolution is here)”이란 노랫말처럼 변화를 위한 노력만큼은 힘껏 지지한다. 높은 현대미술의 문턱을 넘어 마음을 동하게 하는 작품을 만나기까지 어떤 형태로든 디딤돌이 필요할 테니 말이다. 누구에게든 처음은 있는 법이다. ●

글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ㆍ서울시립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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