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스’ 사태 속 엉뚱한 발상…기왕 쓰는 마스크 좀 특별할 수 없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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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바이러스로 온통 뒤숭숭하니 패션계라고 다르지 않다.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탓에 6월 첫 주 백화점 매출이 평균 대비 25%p나 줄었다는 게 정부 발표다. 숫자도 숫자거니와 기실 분위기도 가라앉았다. 한 달 전 서울이 아니다. 글로벌 브랜드들이 줄줄이 서울에서 큰 행사를 치르면서 이 도시는 가장 관심 있고 가능성이 큰 도시로 인정받지 않았나. 한데 이제는 요주의 지역이 됐으니. 크고 작은 패션 행사가 연기·축소 되는 모양새다.

거리를 다녀 보면 비상사태임을 눈으로 실감한다. 햇살은 좋고 습기는 없는, 한창 멋부리기 좋은 황금 시절이건만 눈길을 끄는 건 ‘마스크맨’들이다. 살랑살랑 치마를 입고 하이힐을 신은 아가씨나, 브랜드 로고가 선명히 박힌 고급 핸드백을 든 노부인이나, 옷차림은 보이지 않는다. 시선은 자연스레 흰색의 마스크로 간다. 공포와 불안이 밀려온다. 그리고 동시에 드는 생각. 저 마스크는 kf80까 95일까, 아니 최상급 99일까.

허나 이 와중에도 누군가는 다른 선택을 한다. 며칠 전 출근길에 지하철 앞자리에 앉은 청년이 그랬다. 그의 마스크는 흰색도, 하늘색도 아닌 에메랄드색이었다(병원 의료진이 쓰는 그 청록색은 분명히 아니다!). 따로 놓고 보면 별것도 아닌 색깔인데 단지 그게 마스크라는 이유로 남달라 보였다. 그뿐이랴. 그는 마스크 컬러와 ‘깔맞춤’을 한듯한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혼자 만든 것일까, 외국에서 사 왔나, 아니면 특별 주문했나. 무슨 명품 백이라도 되는 양 흘끔흘끔 마스크를 쳐다봤다.

깨달음은 그가 내리고 난 뒤에 왔다. 세상 모든 것에 디자인이 적용된다면, 더구나 누군가와 다르고 싶은 게 패션의 근간이라면 마스크도 예외가 아니라는 걸 말이다.

찾아 보니 이미 이를 간파한 이들도 있었다. 미국에서는 ‘패션 마스크’를 특화한 브랜드가 생겨났다. 황사나 미세먼지에 대비해 나온 신종 사업이었다. ‘프리미엄’이라는 수식어도 빼놓지 않으면서 말이다.

해외 디자이너 중엔 아예 패션쇼에 마스크를 내세우기도 했다. 지난해 가을 홍콩패션위크에 참가한 디자이너 니나 그리피는 초미세먼지를 막을 수 있는 마스크를 주요 소품으로 등장시켰다. 베이징 유학 당시 극심한 미세먼지를 경험한 게 동기였다. 지퍼를 달아 마스크를 쓰고도 먹을 수 있도록 만든 디자인, 망토나 숄과 합쳐진 디자인 등이 공개됐다. 좀 황당해 보이는 쇼에 대해 그는 당당하게 포부도 밝혔다. “마스크는 인류의 몸을 보호하기 위한 과거의 기능에서 이제는 선글라스처럼 하나의 패션 영역으로 자리잡을 거예요.”

감염 예방이 목적인 마스크에 무슨 멋을 따지느냐고 코웃음 칠 수도 있다. 그런 이에게 이 일화를 들려주면 어떨까. “스티브 잡스가 병원에 입원 당시, 폐 전문의가 그의 얼굴에 마스크를 씌우려 한 적이 있다. 잡스는 그것을 벗겨내고 디자인이 마음에 안 들어서 쓰기 싫다고 투덜거렸다. 마스크를 다섯 가지쯤 가져오라고, 그러면 마음에 드는 걸 고르겠다고 지시했다. 그러고는 더 단순하게 디자인하는 방법을 제안했다.(『스티브 잡스』)” 디자인에 그토록 집착한 그였기에 하나의 통신 장비에 불과했던 휴대 전화가 이제는 패션 아이템이 됐다. 미세먼지와 황사, 바이러스가 사회 이슈가 된 지금, 마스크가 그 다음 주자일지 누가 알겠는가.

글 이도은 기자 dangdo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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