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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의사보다 심리학자가 더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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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정하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김정하
정치국제부문 차장

우리나라에서 흡연으로 사망하는 사람은 연간 3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이렇듯 치명적인 물품이지만 담뱃갑을 쳐다볼 때 식은땀을 흘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동차도 아주 위험한 물건이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한 사람은 4762명이며 부상을 당한 사람은 33만 명이 넘는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 아침도 아무 걱정 없이 버스나 택시를 타고 혹은 직접 차를 몰고 출근했다.

 그런데 지금 온 나라가 난리법석인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은 어떤가. 물론 메르스는 위험한 질병이다. 하지만 메르스 사태 이후 같은 기간 중 교통사고 사망자는 메르스의 수십 배에 달하지만 자동차 패닉 현상이 생겼단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왜 우리는 훨씬 더 위험한 것엔 태연하면서도 타 지역에서 온 전염병에 대해선 이토록 예민한 것일까. 최근 조명을 받고 있는 진화심리학 이론에 따르면 인류는 과거에 진화한 환경에서 위험한 대상이었던 것을 더욱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가령 현대인의 두뇌엔 뱀이나 거미에 대해 본능적인 공포심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우리의 조상들이 과거 수백만 년에 걸친 수렵·채집생활 시절 뱀과 거미로부터 큰 위협을 받았기 때문이란 것이다. 반면 자동차와 담배는 아주 최근에 생긴 위험이어서 그것에 대한 두려움이 진화적으로 형성되기까지 시간이 충분치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뱀은 사진만 봐도 불안감을 느끼지만 훨씬 더 실제적 위협인 자동차에 대해선 무감각하다.

 전염병도 마찬가지다. 인류 진화 과정에서 지역별로 분포한 바이러스·세균에 따라 사람들의 면역체계도 다르게 발달했다. 그러다 보니 이쪽에선 별것 아닌 병균도 다른 지역에 가면 치명적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전염병을 옮길 만한 개체나 사물과의 접촉을 극도로 꺼리는 심리기제를 발전시켜 왔다는 것이다. 물론 현대사회에선 의학의 발전으로 과거와 같은 참사가 생길 가능성은 극히 희박해졌다. 또 우리 주변엔 전염병보다 훨씬 위험한 게 널려 있다는 것도 잘 안다. 그래도 막상 전염병이 생기면 유인원 시절부터 두뇌에 깊숙이 탑재된 전염병 공포는 우리의 연약한 이성을 간단히 압도한다. 그래서 메르스를 피하기 위해 메르스보다 더 위험한 자동차를 몰고 강원도로 피신 간다는 웃지 못할 일도 생긴다. 메르스 사태 극복을 위해 우리에겐 의사보다 심리학자가 더 필요한 것 같다.

김정하 정치국제부문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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