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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아내가 보낸 어떤 사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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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강인식
강인식 기자 중앙일보 기자
강인식
사회부문 기자

아내가 출근하고 없는 토요일이었다. 돌쟁이 아이를 먹이고 재우는 건 남자로서 쉬운 일이 아니어서, 나는 금세 녹초가 됐다. 우는 애를 재워본 남자라면 아빠의 한계를 이해할 것이다. 아이는 겨우 잠들었고 나는 야구 중계가 보고 싶어 거실로 향했다. 그러다 테이블에 놓인 두 권의 책을 발견했다. 『하우스와이프 2.0』과 『린 인(Lean in)』. 아내의 책이다.

 얼마 전 우리 부부는 이사 얘기를 했다. 대치·반포동은 아니어도 그 언저리 이름을 대며 대출 가능한 돈을 헤아려봤다. 그런데 며칠 뒤 아내는 더 이상 그 얘긴 하지 말자고 했다. “아이가 입학하면 직장을 그만둬야겠어. 수입이 반으로 줄 테니 이사는 포기하자.” 전업주부가 되겠다는 말이었다. 문득 13년 전 신입사원 시절 그녀의 야무진 모습이 떠올랐다. “결혼은 생각하지 않고 있어요. 일에서 성취를 느끼고 싶습니다.”

 결혼하고 아이도 낳았지만 아내는 여전히 성실한 직업인이다. 분만 과정에서 치골 인대가 파열돼 3개월간 걷지 못했지만 재활 과정을 거치지 않고 복직했다. 일은 아내에게 그런 의미였다. 그랬던 그녀가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다. “돈 때문에 아이의 모든 걸 아웃소싱하는 워킹맘의 삶은 옳은 걸까.” 아내의 결연함에 ‘돈은 어쩌지’라는 말을 꺼낼 순 없었다.

 그런데 또 얼마 뒤 아내는 일과 육아를 병행할 수 있다며 자기 말을 다시 뒤집었다. 아내의 이런 변덕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다. 하지만 아내의 책을 읽은 뒤 모든 게 대수로워졌다. 하우스와이프2.0과 린 인은 대척점에 있다. 두 책 모두 여성의 주도적 선택을 강조하지만, 한쪽은 전업주부를 다른 한쪽은 커리어우먼을 얘기한다.

 여러 페이지의 모서리가 꾹꾹 접혀 있었다. 아내가 일일이 접어놓은 책장. 그건 엄마와 직장인으로서 그녀가 안고 있는 고민의 궤적일 것이다. 어떤 페이지는 또한 나를 향하고 있었다. 아침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다음 날 등교할 때 입을 옷을 아이에게 미리 입혀 재우는 여성 중역의 고백. 아이를 낳고서야 이런 행동을 이해하게 됐다는 저자 셰릴. 하지만 셰릴은 ‘가사를 분담한 남편의 헌신 덕에 성공에 이르렀다’는 환상적인 결론으로 글을 맺는다. 순간, 아빠의 한계를 얘기하며 언제부턴가 새벽에 아이가 울어도 일어나지 않는 내 모습이 겹쳐졌다. 아내가 접어놓은 페이지는 내게 보내는 어떤 사인(sign)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마침 잠에서 깬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날 난 야구 중계를 보지 않았고, 좀 더 기민하게 움직였다.

강인식 사회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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