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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재난에 대처하는 자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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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양성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양성희
논설위원

어제까지만 해도 마스크를 쓰고 지하철을 타는 게 유별나 보이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마음을 바꿨다. 휴대전화에는 모임 취소를 알리는 문자가 계속 들어온다. 점점 커지는 ‘메르스 공포’다.

 전문가들은 ‘과잉공포’를 가질 필요가 없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나처럼 평범한 시민들에게 ‘과잉대응’을 말라고 할 도리도 없어 보인다. 일단 정부 대처에 믿음이 안 가고, 현 상황에 대해 납득할 만한 충분한 정보가 없기 때문이다. 각종 괴담이나 ‘집단 패닉’의 근원도 여기다.

 메르스 공포 앞에서 1년 전 세월호를 떠올리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국가는 또다시 위기 앞에서 우왕좌왕 무능하고, 신뢰받지 못한다. 소통력 부재도 여전하다. 가령 정부는 5일에야 메르스 감염자가 많이 발생한 병원 이름을 공개했지만 상당수 국민은 이미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을 통해 알고 있던 상황이다. 병원 이름 공개에 따른 혼란을 우려했다는 게 정부 얘기지만, 차라리 처음부터 이름을 공개하고 병원 전체를 격리시켰더라면 오늘 같은 사태는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이런 위기 상황이 정쟁적 이슈로 번지는 것에 대해서도 기시감이 든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심야 긴급 기자회견을 통해 메르스 확진 판정을 받은 서울의 한 의사가 판정을 받기 전 1500여 명과 접촉했다고 발표한 것의 후폭풍이다. ‘무개념 파렴치한’으로 낙인찍힌 의사는 접촉 사실은 시인했지만 메르스 감염을 알면서도 돌아다니지는 않았다고 부인했다. 여론은 이를 두고도 갈라졌다. 기왕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박 시장의 행동에 대한 판단이 엇갈렸다. 그 밖에도 정부 내 의료 전문성 부족, 다인실 같은 의료 시스템, ‘나 하나쯤이야’ 하는 낮은 시민의식 등 불거지는 문제가 한둘 아니다.

 ‘연가시’(2012)와 ‘감기’(2013)는 전염병으로 인한 대재앙을 그린 국내 영화들이다. 두 영화 모두에서 공권력은 간 곳 없고, 주인공들은 외롭게 고군분투한다. 물론 정부가 언제나 만능일 수는 없고 “우리는 우리 수준에 걸맞은 정부를 갖게 되어 있다”(『익숙한 절망 불편한 희망』)는 말도 있지만 이건 해도 너무한다. 연례행사처럼 재난이 몰려오고 그 재난은 우리가 얼마나 후진 국가의 국민으로 살고 있는지를 새삼 깨닫게 한다. 사실 그런 깨달음 후에도 별로 달라진 게 없다는 것이 더 큰 재난일지 모른다. 재난 상황 자체보다 재난에 대처하는 태도가 더 큰 재난이다.

양성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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