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이서 멀리서|"한국교회, 서구신학「틀」탈피할 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한국 개신교는 금년 1백년을 맞이하여 크고 작은, 그리고 다양한 여러가지 기념행사의 사업을 전개해 왔다. 그 가운데서도 신학적으로 우리의 관심과 주목을 끈 몇번의 모임이 있었다. 그 하나가 예장(통합측)이 주최가 되어 모였던 한국교회 l백주년 신학심포지엄(6월27∼29일)이였고 또 하나는 한국 기독교 1백주년 기념사업협의회가 주최한 한국기독교 선교2세기를 향한 선교 신학 협의회(9월20∼22일)였다. 또 하나는 전국신학대학 협의회와 한국기독교학회가 공동으로 주최했던 한국기독교 1백년 기념신학자대회(10월10∼13일)였다.
이 모임들은 한국교회의 신학이 어디까지 왔는가를 살피게했고 앞으로의 방향에 암시를 주었으며 한국기독교신학의 역사에 있어서 새로운 이정표를 세울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 그의의가 자못 크다.
한국의 4대 장로교단들(예장통합, 예장합동, 고신, 기장)의 신학사상이 분열이후 처음으로 한곳에 모여 토의를 했던 첫번째 모임과 함께 제2세기를 향한 신학협의희가「화해」를 그 주제로 삼았다는 점은 한국교회의 미래방향에 의미있는 게시를 했다고 생각된다. 신학사상의 차이가 중요한 교회분열의 요인으로 작용했었음을 깊이 인식하고 있는 한국교회는 그 미래를 위해 함께 신학적 대화를 시도했으며 분열의 극복을 위해 화해의 신학을 강조하게 되었다.
화해의 신학은 회개의 신학이요, 새 창조의 신학이며 십자가의 신학이다. 그것은 남을 위한 존재의 신학이다. 그래서 화해는 동서와 남북의 긴장, 분단의 비극적 역사상황에 있는 우리나라, 오늘의 세계의 정의 자유 평화를 위해 가장 중요한 신학의 주제가 될수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신학이 결코 인간이 살고있는 역사적 상황을 떠나서는 형성될수 없다는 것을 재확인 할수가 있는 것이다.
한국기독교 1백주년기념 신학자대회가 그 주제를 『역사와 신학』이라고 한것은 분명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역사적 상황이란 콘텍스트에서 신학작업은 이루어져야 하며 그것이 곧 신학의 출발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신학」은 남미의 오랜 식민지통치의 쓰라린 역사적 배경, 정치·경제적 억압과 착취의 상황, 사회의 비인간화 등의 현실상황을 출발점으로 한다.
아시아에서 신학을 한다는 것은 아시아의 문화 상황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생명있게 중시하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이 역사현실에서 하느님의 행동은 어떤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응답이요, 역사에서의 하느님의 참여이기도 한 것이다. 오늘의 신학은 삶의 현장에서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때만이 가능한 것이다. 신학하는 자세는 강도만난 사람을 스쳐지나가는 제사장이나 레위인의 자세일수가 없다. 강도만난자의 음성을 듣고 그 현장에서 인간을 살리는 자세인 것이다.이것이 인간해방의 역사요, 하느님의 해방의 역사인 것이다.
지난 1백년동안 한국기독교는 서구신학의 틀에 얽매여 있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의 신학적 노력은 그 틀을 극복하는 일과 우리의 역사와 문화에서 하느님의 계시를 찾고 설명하는 것이이야한다. 아프리카 신학이 흑인인종차별 극복의 역사를 떠나서 신학을 할수가 없듯이 우리는 분단된 상황에서의 피맺힌 한의 역사를 떠나서 신학을 할수가 없는 것이다. 하느님은 지금 이 역사 한복판에서 우리를 부르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직도 일부에서는 1백년전 선교사의 신학을 그대로 지키라고 한다. 그것은 분명 신학식민주의자다. 한국교회는 1백년전 선교사의 신학위에 지금 서 있을수가 없는것이다.
한국의 신학자들은 한국의 역사와 문화의 빛에서 성서와 기독교역사를 조명하고 해석하는 노력을 시작했다.
우리는 성서의 메시지와 십자가의 사건, 그리고 부활의 역사를 우리의 역사현실에서 생생하게 경험하고 증거할수가 있게될 것이다. 이제 한국신학은 한국인의 역사와 문화의 전통에서 성서를 읽고 해석해야 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