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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 반도체산업 찾아내려면 현대미술 해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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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7면

이승한 넥스트&파트너즈 회장이 45년간 기업에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경영이론서를 펴냈다. ‘뒷다리론’(조직 이기주의 경고), ‘메기론’(긴장감 강조) 등 한국식 비유로 글로벌 경영의 틀을 세웠다. [최승식 기자]

스마트폰, 메모리 반도체, 자동차 부품, 탱커, 특수선….

 우리나라가 ‘세계 1등’인 품목들이다. 유엔에 따르면 이런 품목이 65개(2013년 기준)에 달한다.

 “그런데 왜 경영이론은 한국 것이 하나도 없나요. 왜 미국이나 유럽, 심지어 인도 교수가 펴낸 책만 공부하나요.”

 이승한(69) 넥스트&파트너즈 회장의 뼈아픈 일침이다. 그는 한국 기업의 산증인이다. 1970년 삼성그룹에 입사한 이후 97년 삼성물산 유통부문 대표를 거쳐 삼성테스코 홈플러스 대표, 홈플러스 그룹 회장까지 최고경영자(CEO)로만 16년을 보냈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을 도와 삼성의 ‘신경영’을 주도한 브레인이기도 하다. 그가 최근 경영에세이나 기업회고록도 아닌 경영이론서를 펴냈다. 한국능률협회컨설팅이 출판한 이 책의 제목은 『EoM(Essence of Management, 경영의 정수)』. 지난 22일 서울 역삼동 넥스트&파트너즈 사무실에서 한국의 경영 달인이 말하는 ‘정수’를 들어봤다.

 이 회장은 경영의 목적을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서’라고 했다. “이제 이윤만 추구하는 회사는 성장의 덫에 걸릴 수 밖에 없고, 의식있는 책임을 가진 기업만이 좋은 기업이 될 수 있다”는 믿음에서다. 그는 2013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뒤 서울·보스턴을 오가며 세계적인 경영구루들과 1년에 걸쳐 토론을 거듭했다. 이를 바탕으로 하되 도시계획학 박사 특유의 기발한 ‘경영건축학 설계도’를 개발해 경영의 틀과 20여개의 실행모델을 제시했다.

 불행히도 이 회장은 “지금 한국은 산업역사상 가장 거대한 위기에 처했다”고 진단했다. 이 상태로 가면 “2025년쯤 한국은 잃어버린 10년으로 기억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경영 외부적인 양대 위기는 ‘저출산·고령화’와 ‘왜곡된 경제민주화’다. 특히 “자극적이고 포퓰리즘적인 경제민주화란 말을 ‘경제선진화’로 고쳐야 한다”며 “대기업에 쏠린 부(富)가 문제가 아니라 나쁜 방법으로 쏠린 부를 바로잡는 게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경영 내부적으론 기존 산업의 틀 안에 갇혀버린 ‘갈라파고스 현상’이 문제다.

 “미래 먹거리는 적당히 혁신해서 찾아지는 게 아니에요. 삼성이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라’고 했듯 혁신은 살 각오가 아니라 죽을 각오로 하는 겁니다.”

 30년 삼성맨으로서 현재 삼성에 대한 평가는 “나쁘지 않다”고 했다. 다만 “고객이 가장 좋아하는 것을 극도로 미세하게 잡아내야 하는데, 여전히 고객보다는 개발자의 입장에서 죽자사자 노력하는 것 같다”고 쓴소리를 던졌다.

 이 회장의 이론 가운데 서구 경영학자들이 가장 환호한 것 중 하나가 ‘됨됨이 리더십(Being Leadership)’이다. 그는 “아무리 지식이 많고 용병술이 뛰어나도 품성이 떨어지는 리더는 직원과 조직, 실적을 망가뜨린다”고 말했다. 리더의 됨됨이에는 위험을 감수하는 기업가 정신도 포함된다. 그는 이병철 고(故) 삼성그룹 회장의 일화를 소개했다. “처음 반도체 사업을 시작할 때 일본은 ‘잘못되면 본업까지 날릴 사업’이라며 포기했어요. 대신 영화사와 부동산을 사들였죠. 하지만 이 회장은 반도체를 ‘시간산업’이라고 봤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빨리 개발하기만 하면 엄청난 돈을 벌 수 있다’고 했어요. 그렇게 1994년에 정말 세계 최초로 256메가 D램을 개발했고 지금까지 국가경제를 좌우하는 산업이 된 겁니다.”

 이 회장은 “제2의 반도체 산업을 찾아내려면 현대미술을 해야한다”고 말했다. 평범한 변기가 샘이 되고, 텅 빈 하늘에 비행기가 날게 된 것 처럼 “별것 아닌 걸 별것으로 만들고, 눈에 안 보이는 걸 보이게 해야한다”는 얘기다. 여기서 중요한 게 ‘열림과 나눔’이다. 최근 각광받는 3D 프린팅도 처음엔 진척이 없다가 오픈소스로 공개해 수백명의 사람들의 아이디어가 보태지자 놀라운 성과를 냈다는 예를 들었다. 그가 설립한 넥스트&파트너즈도 ‘함께 다음으로 가자’는 의미다.

 “지금 미국이나 유럽에선 한국적인 경영에 굉장히 관심이 많아요. 끈끈한 팀워크, 조직을 위한 자발적인 희생, 압도적인 서비스와 치밀한 기술력의 비결이 뭐냐는 거죠. 이제 우리도 한국식 경영이론에 자신감을 가져도 됩니다.” 서양이 주도해 온 100년 경영학 역사에 ‘한류(K-Edu)’가 불 날이 머지 않았다.  

글=이소아 기자 lsa@joongang.co.kr
사진=최승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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